잡동사니/끄적휘적

상생(相生)이란 무엇인가?

바위산(遊山) 2005. 12. 11. 23:59

상생이란?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닌 나도 살고 너도 살자는 것이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너 죽고 나도 죽고 서로 같이 죽자는 말이다. 거기에 순서가 있다면 남보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살려하고자 하는 한 상생은 힘들고 험한 길이며 결코 이르지 못할 길이다. 내가 사라질 때 상생과 조화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 인자를 뜯어보면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것을 알수있다. 그래서 인간은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인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 서로가 서로에, 또는 만물에 기대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사람을 포함한 만물에 의존하여 지금 숨쉬고 살아가고 잇는 존재가 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존재들의 생명과 행복은 곧 나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남과 만물이 반드시 행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을 상생이라 하는 것이다.

상생은 오행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오행을 알아야 상생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오행이란 만물을 구성하는 다섯 인자들의 서로를 돕는 관계를 말한 것이다. 상생은 하늘이 운행하는 법칙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하늘은 텅 빈 공간이기 때문에 아무런 마찰이나 자극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상생이란 용어가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상생은 이상적인 꿈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상극은 땅이 운행하는 법칙을 나타내는데, 땅은 물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물질에는 반드시 상대적인 음양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마찰과 자극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무가 쓸모 있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낫이나 칼 등, 연장으로 다듬어야 하므로 금극목이라 하고, 쇠(金)는 용광로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쓸모 있는 연장으로 거듭나게 마련이므로 화극금이라 하며, 불은 물이 없으면 모든 것을 태워버리게 되므로 반드시 물의 극(克)을 받아야 하므로 수극화라 하고, 물은 또한, 흙이 없으면 담을 그릇이 없게 되므로 토극수라 하고, 흙 속에는 나무가 씨앗을 발아하고 뿌리를 뻗어야 하는 것이므로 목극토라고 하게 된 것이다.

상생의 법칙은 하도(하도, 낙서 : 음양의 변화 이치를 그린 도안)에서 비롯한 것이며, 상극의 법칙은 낙서에서 비롯하였고, 이 둘을 합한 상태는 용담이라고 한다. 우주의 법칙은 상생과 상극의 어느 한 면만 가지고서는 온전한 운행을 할 수 없으므로, 이 둘은 적당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를 가리켜 상생도 아니고, 상극도 아닌 '상생 상극 합덕'이라 한다.


합덕과 상극이 다른 점이 있다면, 상극은 오행이 서로 경쟁하여 이기려고 하는 '극(克)'을 하였지만, 합덕은 서로 상대방이 끝까지 잘되게 해주는 극(極)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는 서로 '남 잘 되는 공부'를 해야 할 때인데, 그것이 바로 '합덕문명'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보시라 한 것이다. 상생과 자비는 나와 다른 남을 돕는 마음이다. 받는 것을 바라지 않고 주는 마음이다.
그것의 실천은 나의 내려놓음을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가능하다.

상생과 자비의 뿌리는 무아(불교에서 불변의 실체인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란 양분을 공유하고 있다. 파사현정(사악한 생각을 깨뜨리고 바른 생각을 뚜렸히 드러냄)을 기억하는 불자라면 마땅히 자비와 상생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내가 남을 파사현정하려 한다면 남 또한 나를 파사현정하려 할 터인즉 결국 현정은 없고 파사만 남게 된다. 그것은 상생이 아니고 상멸의 길이며 부정은 또다른 부정을 낳게 될 뿐이다. 내것만 진리고 남것은 외도라 하기엔 이세상은 그때에 비해 너무도 많은 다양함으로 꽉차있다. 그리고 그 다양함은 인류가 그동안 축적해온 보편적 지식과 이성에 어느 정도 근거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 말은 쉽사리 남의 말에 설득되지 않고 쉽게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파사현정은 내건 옳고 남건 틀리고 사악하다는 전제, 그 전제하에서 내건 지키고 남의 것은 다 쓸어버려야 할 존재라고 하는 생각, 그 생각 자체가 먼저 파사현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팽배한 사회면 사회일수록 그것은 그 사회의 상멸과 불행만 가져올 뿐이다. 상생은 구호와 말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화는 다름과 견제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이며 조화야 말로 이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인 것이다. 모든 것을 같게 할려고 하지마라. 그것은 곧 죽음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무지 중에 상무지고 집착 중에 으뜸가는 집착이다.

다름 속에 들어있는 같음을 보는 지혜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죽여야 한다. 나의 사라짐, 그 때는 파사현정할 나도 대상도 없어진다. 그리고 그것들 또한 다름이 아닌 같음이요, 부분이 아닌 전체요, 둘이 아닌 하나였음을 알게 된다.

 

상생은 상대의 부정이 아닌 긍정을 통해 이를 수 있는 세계다. 무아는 없고 내 것만 외치고들 있으니 상생은 커녕 상사가 안되면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일은 거창하게 상생을 외치고 파사헌정을 외치고 있느니 지금 이 자리 나의 욕심하나 먼저 내려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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