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끄적휘적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위산(遊山) 2013. 1. 2. 01:03

민주주의의 근간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해서 등장한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 재산권 보장 등 기본권의 존중과 의회중심의 대의정치에 입각하여 개인의 자율성과 인권을 인정하였지만 정치적자유는 특권층(여성과 하층민을 제외)에 한정되었으며, 경제활동의 자유와 재산권의 자유가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또한 근대민주주의는 민주만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 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나, 중우정치(다수의 어린석은 민중이 주도하는 정치로 민주주의의 폐단을 말함)로 흐를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파시즘(선택받은 유능한 지도자에 의한 정치적 통치만이 전체 인간의 복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의 도전을 받게되나, 파시즘은 지나치게 전체주의를 우선하여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독재의 행태를 보이기도 하는 폐단으로  소멸되고 만다.


파시즘의 도전을 극복한 민주주의는 다시 한 번 공산사회주의의 도전을 받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유민주주의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생산수단 소유하고 노동자 고용하여 기업 경영하는 자본계층)로 민주가치의 한계성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민주주의의 본질인 자유와 평등을 사회민주주의에서 찾아 볼 수도 없었으며, 개인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특정부류인 노동자 중심의 평등은 경쟁력 저하와 생산성 하락으로 경제적 정치적 몰락을 가져오게 하였다. 

 

참정권을 제한하던 근대민주주의는 20세기 중반부터 대부분 민주국가에서 성인이면 누구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대중민주주의를 택하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효율성과 합리성이 결여되는 정치행태를 보이게 된다. 대중들은 자신이 선택한 정치가 소속된 국가와 개인에게 미칠 영양에 대하여 장단기적인 분석보다는(모두가 그럴 능력도 없지만) 조작된 여론과 군중심리에 의하여 판단이 약화되어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투표형태를 보이게 된다.

 

그것은 대중의 무지함에서 비롯되며,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위협일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본래 신분과 교양을 전제로 한 정치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신분이란 사회구성원으로 책임을 지고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위치를 뜻하며, 교양이란 옳고 그름을 바르게 판별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미래에 대한 통찰력까지도 뜻하며, 이는 민주주의를 위한 대중의 전제조건이다. 아직도 일부 국가에서 신분에 따라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과 미성년자에 대한 참정권의 제한도 이같은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그 나라 국민의 민도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 '파시즘'이나 '사회주의'에 이어 참정권의 확대로 인한 중우정치의 비효율성과 불합리성이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심각한 도전이라 할지라도 참정권을 더 이상 제한하기는 어렵다.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민주에 대한 민도의 향상이다. 청치에 참여하는 대중이 국가와 국민의 발전과 효율을 가늠하고 앞날을 예견할 수 있는 성숙한 민도를 만들어 가는 것 만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끝내고 해방이 되자, 자유를 얻었다고 환호하는 우리 국민들 중에는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먹고 식대를 지불하지 않고, 전철을 타고도 차비를 내지 않는다. 왜? 자유란다. 남의 것을 강탈하고 남의 인권을 짓밟는 행동을 자유라 확정하는 무지함이 보여주듯, 우리의 짧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주인답지 못하여 왜곡, 허위, 비방, 심지어는 욕설 등 파렴치하고 양아치 같은 행동을 서슴치 않으면서도 그것을 민주라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분명, 이 나라의 정치제도는 자유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는데, 이 나라의 주인된 국민들의 행태를 보면 주인노릇 하기에는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부터라도 민주를 부르짖지만 말고, 나라의 주인된 위치에서 정치를 바라보고 권리를 행사하는 성숙함을 만들어 가는 것이 민주국가의 주인된 자세이며, 이땅에 더욱 발전된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유일한 방법임을 깨닳아야 한다. 혹여, 무지한 대중에 의하여 '중우정치'나 '파시즘'의 부활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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