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끄적휘적

변화를 갈망하는 2040에게 고한다.

바위산(遊山) 2011. 11. 18. 14:43

우리는 사상 유래 없는 고속 성장을 이룬 한편으로 복지에는 인색한 면이 있었다. 더 빨리 더 많이 성장하기 위하여 끝없이 몸부림쳐 왔으며, 대부분 그 성과를 인정하였다. 그렇게 국가경제의 파이를 키워가는 과정에서 많은 부를 축척한 계층도 있고,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고통받는 계층도 발생되었다. 그러한 격차가 분배의 욕구를 키우게 하였으며, 급기야 나라안이 무상복지 논란으로 시끌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된 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를 필두로 우리는 뼈아픈 고통을 감내하며 잘살아 보자고 몸부림쳤다. 그로부터 50여년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세계사에 기록될만한 신화를 만들어 냈다. 헐벗고 굶주리던 백성들은 기름진 음식과 상상도 못 할 문화와 교육의 혜택을 누리면서 민주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고, 다시 복지에 대한 열망을 키우게 된다.


복지에 대한 열망은 절대적 빈곤(궁핍)에서 나오지 않고 상대적 빈곤(가난)에서 발생한다. 모두가 어려울땐 나눌 것이 없으므로 복지나 분배라는 욕구는 실현될 수도 없고, 기대하지도 않는 법이다. 자유(성장)와 평등(분배)이 고귀한 가치임에도 자유와 평등이 공존하기란 매우 어렵다. 평등 논리로 인하여 열심히 노력한 사람의 몪을 나누고자 함은 노력하는 자의 자유(성장)를 구속함이요,  자유주의 논리로 인하여 나눔를 게을리 하면 빈부의 격차가 커져 평등 논리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는 자유시장주의의 팽창이 공산사회주의를 만들었고, 공산사회주의 팽창이 유렵 중심의 복지국가를 만들어 냈다. 묘한 것은 성장보다 분배를 강화시킨 순서대로 파탄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좌파적 경제학자인 '로널드 드위킨' 교수도 "평등(분배)이 자유(성장)보다 커진다는 것은 개미의 목을 빼앗아 배짱이 한테 주는 격이라" 하였으니, 모두가 궁핍의 나락으로 떨어져 분배 자체의 소멸을 염려하는 것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문민정부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하여 노동자의 근로조건과 임금구조 개선에 많은 공을 들였다. 결과는 소수의 고임 귀족노동자와 다수의 저임 비졍규근로자를 양산하는 비극으로 결말지어지고 만다. 또 한 참여정부의 지방분권화 정책은 전국토의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켜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을 부자는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이변을 만들어 냈으며, 폭등하는 부동산에 주눅들어 과도한 부채를 안고 뒤늫게 합류한 젊은층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게 되었다.

 

그것은 전체적 파이를 키우지 못하고 한정안에서 인위적 분배를 유도했기 때문에 발생된 부작용으로 '로널드 드위킨' 교수의 충고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발생된 오류이며, 가장 피해를 본 것은 그들을 지지했던 진보세력과 젊은이들이며, 가장 혜택을 입은 것은 그를 반대하던 기득세력이라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은 묘한 것이다. 인위적으로 세상을 뒤집으면 누가 먼저 다치는지는 논할 가치도 없다. 볼세비키혁명과 모택동 혁명의 결과가 그것을 말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리도 부러워하던 복지천국 유럽의 지금을 주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분배의 정의란 무었인가? 우리의 분배욕구는 소득격차의 심화에서 비롯된다. 즉, 절대적 빈곤보다는 상대적 빈곤에서 비롯되며, 소외와 상실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능력과 성과보다는 고학력, 고학벌에 따른 소득격차의 심화를 방치하였으며, 그것이 내자식만큼은 상류사회에 진입시키고 싶은 부모들의 교육열기로 치닫게 되고 교육인플레라는 기현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저임3D업종은 외국인노동자나 5060세대가 떠맞고 대학졸업장 하나 믿고 상류사회를 지향하던 젊은이들은 암울한 현실의 벽에 부딧쳐 돌팔구를 찾지 못하고, 불만과 변화의 욕구를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지금의 정치인들이 복지를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권력에 목을 메는 자들의 득표포풀리즘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지금의 2040세대가 복지확대에 매달린다면 그 재원은 누가 조달할 것인가에 골몰하여야 한다. 이미 5060세대의 판은 끝나가고 있다. 결국 얼마 가지않아 당신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부양물로 전락될 되고 말것이며, 그 복지의 짐은 기성세대가 아닌 2040세대가 모두 짊어질 수 밖에 없음을 감지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전체적 파이를 키우는 성장을 도외시 할 수 없으며, 이를 외면하여서도 아니된다. 암울한 그대들의 고충을 모르는바 아니나, 그렇다고 무조건 바꾸고 뒤집고 하는 것은 상처만 만들어 낼 것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며, 세력확충과 권력에 혈안이 된 정치인의 표리부동에 솔깃하는 모습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절대복지는 필수이지만 보편적복지에 경계를 게을리 하여서는 아니된다. 인위적, 보편적 복지는 자칫 성장을 어렵게 하고, 후일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전체적 파이를 키우고, 고용창출과 직종간, 학력간의 소득격차를 줄이는 것에 골몰하여야 한다. 고액연봉을 자랑하는 귀족노동자들의 연장근로를 축소하여 젊은이들에 일자리를 만들어 주어 고용창출을 유도하고, 직종간, 학력간, 기업간에 나타나는 기형적 소득격차를 줄여나가, 자연스러운 분배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 또한 불로소득을 차단하여 노력과 성실로 성과를 내는 사람이 잘사는 사회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특정계층에 불로소득이 발생하면 그 소득만큼 다른 사람들(서민계층)이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 내조카와 젊은 이웃, 그리고 이 시대, 이 땅에서 돌팔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고통스러움에 가슴이 시리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백성으로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암울함속에서 지금을 만들어낸 기성세대를 보라! 민주를 사치쯤으로 알고 어떻게든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보려 굶주린 허리띠를 졸라매며 피땀어린 기성세대의 노력을 부정하여서는 아니되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이 땅의 희망이자 미래인 2040세대에 고한다! 

세상에 어떠한 어려운 환경도 인내하고 노력하는 자를 영원히 구속시킬 수는 없다. 지금 어렵다고 좌절하여서도 쉽게 뇌하부동하여서도 아니된다. 이 땅의 주인답게 무엇이 나와 국가와 민족의 영광된 앞날을 만들어 줄 것인가에 골몰하고 심사숙고하여야 것이다. 그대들에게 보수골통이라 불리우는 기성세대의 언저리에서 평생을 일밖에 모르고 살아 온, 소시민의 간절한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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