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에는 아름다운 계곡이 4개 있다. 용소계곡과 덕풍계곡, 그리고 왕피천과 불영계곡이 있다. 여행겸 금강송 숲길과 계곡을 둘러 볼까하여 울진을 찾았다. 계곡트레킹을 작정하였으나, 죽변항에서 대게와 회를 안주로 넘 퍼부은 탓으로 트레킹은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사랑바위>
<불영계곡-아래로 쭈~욱>
금강송숲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서 두 사람이 지키고 있다. 6월부터 예약제가 시작되어 예약을 하지 않고는 입장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려 불영계곡 도로를 타고 내려오며, 군데군데 경치 좋은 곳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구경한다. 지난해 이맘때에도 아들놈과 마누라와 다녀간 곳이라 불영사는 들리지 않고 지나친다.
불영사는 천축산 불영계곡에 있는 대찰이다. 651년(진덕왕 5) 의상이 창건하였다. 부근의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과 비슷하므로 천축산이라 하고, 전면의 큰 못에 있는 아홉 마리 용을 주문으로 쫓아낸 후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서편에 부처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그 그림자가 항상 못에 비치므로 불영사(佛影寺)라 불렀다고 한다. 1397년(태조 6)에 화재로 타버린 것을 소운이 중건하였는데, 그 후 다시 소실되어 1500년(연산군 6) 양성법사가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모두 소실되었으나 응진전만은 피해를 면했다고 한다. 그 후 1609년(광해군1년) 진성법사가 재건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승려들의 손으로 중수가 거듭되었다.
<불영사>
<성류굴입구>
성류굴도 지난해에 들렀던 곳으로 들리지 않고 격암 남사고유적지로 향한다. 불영사와 성류굴 사진은 작년에 찍은 사진이다. 남사고는 역학, 참위, 천문, 관상, 복서의 비결에 뛰어났다. 본관은 영양. 호는 격암(格庵). 명종 말기에 이미 1575년(선조8년)의 동서분당과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등 많은 일화가 전해져온다. 또한 풍수지리에 많은 일화를 남겨 재난이 일어날 때의 피신처를 구체적으로 예언·지적했다. 도가적 행적으로 말미암아 일부 문헌설화와 구전설화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그의 십승지설은 조선 후기 이래의 변혁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죽은 뒤 울진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인〈남사고비결>〈남격암십승지론> 등의 도참서가〈정감록〉에 수록되어 전한다.
<남사고유적지>
<격암유록>은 조선 명종 때 예언가 격암 남사고(1509~1571)가 어린 시절 '신인(神人)'을 만나 전수받았다는 예언서로, 총6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설에 따르면, 남사고가 젊은 시절 금강산에 들어가 신이(神異)한 승려를 만나 석실(石室)에 인도되어 도서 세 편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격암유록>이라는 것이다. 격암유록은 임진왜란, 동학혁명, 한일합방 뿐 아니라 광복과 분단, 6·25전쟁, 4·19 혁명과 5·16 쿠데타 등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등 역사적 인물의 행적을 정확히 예언하고 있어 "450년 만에 신비의 베일을 벗는 민족의 경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50년된 고욤나무>
그러나 <격암유록>은 위서 논란 한가운데 놓여 있다. 20여 년간 격암유록과 각종 비결서를 연구한 김하원씨는 <격암유록>의 경우 특정종교, 구체적으로 말해 전도관 박태선(1990년 사망)을 염두에 두고 쓴 위서"라고 단언한다. 김씨가 <격암유록>이 위서라고 추정한 이유는 무엇보다 <격암유록>에 사용한 한자가 일본식 한자어가 많다는 점. 철학(哲學)이나 공산(共産), 원자(原子) 등 기껏해야 만들어진 지 100여 년 밖에 안 되는 한자 조어가 <격암유록>에 등장한다. <격암유록> 의 일부 내용이 성경을 그대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도 지적된다.
한국의 예언서로 유명한 <격암유록>은 종종 요한계시록과 비교된다. 유사한 내용이 곳곳에 기록됐기 때문이다. 격암 남사고가 글을 쓸 당시는 16세기였다. 이때만 하더라도 천주교와 기독교가 한반도에 전해지지 않아 남사고가 요한계시록을 베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원본은 일제강점기에 소실됐다. 일본의 패망과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국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 일제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격암유록> 원문만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 중에 있다.
<격암유록>은 일반적인 종말설과 달리 구원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책의 기록에 따르면 미래의 세상은 ‘불로불사’ 즉,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삶이 펼쳐진다. ‘불로불사’를 가지고 올 한 사람, 곧 정도령(正道令)이 나타나는데 이 사람은 한반도에서 출현한다. 예언은 정도령이 언제 어디서 태어나며, 가지고 나타날 증표는 무엇인지, 어떠한 말을 하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돼 상징적으로 기술된 노스트라다무스와 비교되며, 사람들이 가야할 곳 ‘십처십승지’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생명예언이라고 하는 ‘격암경사’는 세상의 때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영웅호걸이나 박식한 철인이라도 다가올 시대를 알지 못하면 어리석고, 반대로 시래(時來)를 알면 걸사라고 일컫는다. 이렇게 명예언가인 남사고였으나 삶은 늘 불우했다. 그는 늘 죽음과 직면할 정도로 병이 많았으며, 한겨울에 외출복이 없어 지인의 문상조차 가지 못했으며, 말직에 종사한 하급관리였다.
격암 남사고유적지를 둘러보고 죽변등대로 이동하던 중에 수령이 500년 이상으로 밑동에서 2개로 갈라져 자라고 있으며 높이 11m에 굵기는 1.5m 가량으로 1964년 천연기념물 제158호로 지정된 향나무를 보았다. 향나무 옆에는 마을의 성황사가 자리잡고 있어 죽변리 주민들에게는 신목(神木)으로 대접받고 있어, 안전을 기원하는 선원들의 신목이 되었다. 이 향나무는 수백년전 울릉도 해안가에서 자생하던 향나무가 파도에 밀려 울릉도와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떠내려와 자라게 됐다고 믿고있다. 이는 죽변리 인근에는 향나무가 전무한데다 울릉도에서 자라는 향나무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향나무를 소개하는 입간판에도 울릉에서의 이주설이 적혀 있다.
죽변등대 산책로는 사람들에게 바다의 '로망'을 꿈꾸게 한다. 하염없이 일렁이는 푸른 빛깔의 바다와 늘어서 있는 갯바위에 부딧히는 파도가 그렇다. 죽변(竹邊). 한자의 풀이처럼 '대나무가 많은 해변(?)'쯤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마을은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와 'KBS 오락프로그램 1박2일' 촬영한 곳으로 명성이 꽤 알려졌다. 촬영장이란 표지판을 끼고 마을 도로를 잠시 올라가면 가슴이 탁 뚫릴 듯 한 망망대해와 해안절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니 한쪽 절벽 위 야트막한 봉우리를 뒤덮은 대나무숲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로 '대나무숲 오솔길'이란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이곳이 "용의 꿈길"이다. "용의 꿈길"이라, 전설에서 따왔다지만 참 기막힌 이름이다. 먼 옛날, 오직 승천(昇天)만을 꿈꾸던 용이 있었다. 승천을 위해 기나긴 세월을 견디며 바다 속을 헤집고 다녔고 기어코 용암이 둘러싸여 있는 이곳 용소에서 승천의 소망을 이루었다. 용의 꿈이 이뤄진 신성함 때문일까.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은 가뭄이 극심해지면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다고 전한다.
해안가 바위절벽에 소나무가 위태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소나무 아래로 이름모를 가을꽃이 청초하게 피어있고 해안 언덕에는 활짝핀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방파제에는 몇명의 태공들이 낚시대를 담그고 있으나, 그리 수확은 좋지 않은 것 같아 세월을 낚고 있는 것 같다.
죽변항로 표지관리소엔 약 20m 높이의 새하얀 등대가 우뚝 솟아 있다. 죽변등대는 만들어진 지 벌써 100년째라고 한다. 오래된 역사와 아름다운 외형으로 2006년 '등대문화유산 제11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등대는 올라가지 못하도록 굳게 잠겨져 있다. 주말이면 여행객들이 찾아와 등대 앞에서 사진을 많이 찍고 가지만 등대가 너무 노후하기 때문에 일반인 개방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죽변등대>
<등대조형물>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에 나오는 세트장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절벽 위에 만들어진 이 세트장은 드라마 주인공이 살던 소담스런 옛집과 아기자기한 교회로 꾸며져 있다. 자물쇠로 채워져 내부를 구경할 순 없으며, 지금 한창 수리공사 중이다. 이 곳은 수려하고 빼어난 배경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진의 배경으로 삼는 곳이다.
<폭풍속으로 셋트장>
등대에 올랐다가 언덕길 초입에 죽변이라는 명칭을 실감할 수 있는 "대나무숲 오솔길"이 나온다. 이 일대에 키 작은 대나무들은 오래전부터 자생하던 것들이다. 이곳 대나무숲은 신라시대 화랑이 왜구를 막기 위해 상주한 곳이며 숲을 뒤덮은 대나무들은 임진왜란 때 화살의 재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대나무숲 사이로 나있는 오솔길은 1960년대 지역민들만 사용했다. 이 오솔길이 최근 '용의 꿈길'이란 멋진 이름으로 관광상품화 한 것이다.
최근 항공사진을 판독한 결과 죽변면 일대가 용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사진에 꼭 용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동해안 해안선이 남으로 쭉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가다가 죽변항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선인들은 이곳을 '용이 노닐면서 승천한 곳'이란 의미로 '용추곶'(龍湫串)이라 불렀다.
오솔길로 발을 옮기자 2~5m 정도 높이의 대나무들이 춤사위를 펼친다.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와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멋진 화음을 만들어 놓는다. 오솔길 중간 중간에 친절하게도 전망대가 마련돼 있다. 모두 3곳에 설치돼 있는데 전망대에 서면 그림 속에서 봄직한 한 폭의 풍경화가 고스란히 한 눈에 들어온다.
대나무숲 길이라고 해서 대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군데군데 소나무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500~600m 길이의 오솔길 끝자락. 해변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온다. 계단을 밟고 내려간 바닷가엔 돌멩이 탑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이곳 주민에 따르면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으면서 하나 둘 돌멩이를 쌓아 놓고 갔고 그것이 탑같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용이 이곳에서 자신의 꿈인 승천을 이뤘듯이 저마다 돌멩이에 하나하나를 올리며 소원을 빌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모든 탑에는 기도의 마음과 정성이 담겨 있는 것 같다.
해안의 절경에는 파도에 부딧히는 갯바위가 있다. 갯바위가 늘어선 바닷가에서 고동을 줍는 관광객들이 있다. 따라서 고동을 잡다가 몇마리 잡지 못하고 파도에 쓸려 등산화에 바닷물만 가득채웠다. 해안을 한바퀴 돌면 시가지가 나오고 곧 등대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등대앞에 주차를 하였기에 다시 등대로 올라 차를 끌고 죽변항으로 향한다.
<죽변항>▼
죽변에 가면 자주 들리던 "영덕게 횟집"은 문이 잠겨져 있다.(나중에 알아보니, 몇 집 건너로 이름을 바꾸어 이사함) 비교적 한산한 항구와 수산시장을 한바퀴 둘러보고 횟집에 자리하고 대게와 회를 안주로 한잔한다. 거나해질 무렵, 옆자리에 앉은 울산에서 오신 부부 여행객과 죽이 맞아 주거니 받거니, 부어라 마셔라 하다, 결국 꼭지가 가서야 자리를 파하고 돌아온다.
노인전문정신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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