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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의 발자취를 찾아 <고산유적지>

바위산(遊山) 2011. 8. 2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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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1587 선조20∼1671 현종12)선생은 조선중기에 호남이 낳은 대시인(大詩人)이며, 조선조 시조문학을 마지막 장식한 대가로 알려진 분이다. 윤고산 선생은 학문만이 아니고 철학을 위시해서 경사서 제자백가(經史書 諸子百家)에 통달하여 정치, 학문, 예술 전반에 걸쳐 조예가 깊고 천문, 음양지리, 복서, 의약 등 다방면에 통달하셨으며, 원림경영과 간척사업을 하여 오늘날까지 전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시조문학을 으뜸으로 꼽는다.

해남 육현(六賢)의 한 분으로서 향현사(鄕賢祠)인 해촌서원(海村書院)에 배향된 선생은 전란과 당쟁이 소용돌이치는 격랑의 사회현실 속에서도 강직한 성품의 선비로 조선시대의 손꼽히는 지성이셨다. 정치의 중심에서 나랏일을 맡았을 때는 정성을 다하여 국가경영의 대도를 역설하셨고, 의롭지 못한 일을 보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 결과 세차례에 걸쳐 십수년의 유배생활을 하시는등 유배와 출사, 은둔으로 이어져 있지만, 그 근본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정신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잘 형상화하여 국문학의 비조로서 우리에게 귀중한 문화유산을 남겨주신 분이다. 한시는 물론이고 국문시가는 값진 국문학의 보배이다.


윤고산 선생은 자기를 포함한 주변에서부터 국가사회에 이르기까지 강한 실천의지를 지니었는데, 특히 노비, 어민, 농민, 빈자 등 여러 방면의 사회적 약자에 관한 관심이 높을 뿐 아니라 각 방면에 있어서도 상당히 높은 전문지식을 갖고서 이론을 폈다. 인생의 덕목(德目)을 벼슬에 두지 않고 수신(修身)과 근행(謹行) 및 적선(積善)에 두고 있고 인자한 행실과 검소절약을 제1의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언   제 : 2011년 8월 14일(일)

누구와 : 마누라

어데에 : 해남 고산 윤선도 유적지

머리 해남과 진도와 관매도까지 둘러 보기에는 2일의 시간은 너무도 짧다. 전날 청주로 내려가 장인 장모님 저녁을 사드리고 바이 으슥해서야 청주를 떠나 밤새 달려왔다. 해남에 도착하니, 여명이 밝아온다. 해장국이라도 한그릇 하여야 할 것 같은데, 열어 놓은 집이 없다. 차안에서 1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고산유적지를 찾아간다.

고산선생이 의학과 관련하여 최초로 실록에 나타난 시기는 인조 10년이다. 인조, 효종, 현종때 중궁전과 대비전의 의약(醫藥)을 위하여 고산선생을 불러 들인 것으로 볼 때 고산선생은 의약부문에 있어서도 대단한 경지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정적이었던 송시열, 원두표마저도 고산선생에게 약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을 만큼 인정받는 것이었다. 또한 집안에 약포(藥鋪)를 운영하여 병든 사람들을 구했다는 기록들도 있다. 녹우당에는 약을 조제하기 위해 썼던 '자가용 약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고산선생이 의술을 접하게 된 경위를 사공조참의소(辭工曹參議疏)에서  "어렸을 때 어버이의 질병 때문에 옛 의방을 검토하였으나, 지식이 얕아서 남들이 지나친 추대를 하여도 이것을 매개로 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이천선생이 말한, "병들어서 자리에 누어 있는 사람을 용렬한 의원에게 맡기는 것을 불자, 불효에 비교하니, 어버이를 섬기는자는 또한 의술을 알아야 한다(伊川先生曰病臥於床委之庸醫比之不慈不孝事親者亦不可不知醫)"는 말에서 연유한 것으로 사료된다.

고산선생의 풍수에 대하여는 효종의 왕릉을 정하기 위하여 간산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길도나 금쇄동의 원림을 조성할 때에도 풍수지리가 적용되고, 그리고 자신의 묘자리 역시 선생이 직접 정하신 자리이다. 고산선생의 풍수가 더욱 알려지게 된 것은 정조에 의해서이다.

정조(正祖) 4년(1780) 경자춘(庚子春)에 고산집(孤山集)을 <인입(印入)>케 한 것은 고산집에 실려있는 효종 10년(1659 A.D)의 <기해헌의(己亥獻議):산릉의(山陵議)>를 보고자 함이었다. 이 때에 정조는 영릉을 수원으로 천원할 뜻이 섰으나 잠잠히 10년을 지내다가 옮기기로 결단을 내린 것은 정조 13년(1789 A.D) 기유에 올린 박명원의 소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에 영릉을 화산으로 천원(遷園)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은 윤고산의 <기해헌의(己亥獻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조는 천원(遷園)에 앞서 <산릉의(山陵議)>외에도 고거(考據)할 만한 문헌을 본가(本家)에서 찾아보도록 명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천원한 뒤에도 고산의 <산릉의>가 매우 상세함을 칭양(稱揚)하며, 천원한 것으로 자위(自慰)함을 일렀다.

그리고 그의 감여학(堪輿學)에 대한 신안(神眼)을 칭양하여 이 사실을 홍재전서(弘齋全書 : 卷{57∼58}:雜 著 1편(遷園事實))에 등재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정조 20년(1796 A.D) 병진 3월에 다시 전라감사 서정수(徐鼎修)에게 명하여 종래의 간본에서 잘못되고 빠져 버린 것을 대폭 수정 보완하여 <신간육책(新刊六冊)>을 간행하고, 15부를 인진(印進)케 하였다. 그것을 내각(內閣)에 수장(收藏)하고 본손가(本孫家)에는 첫째권 머리에 <내사(內賜)>본임을 어필(御筆)로 친제(親題)하여 내렸다. 고산선생의 작품집(고산유고)이 판본으로 간행되게 된 것은 선생의 풍수실력 때문이었다.

고산선생은 보길도와 금쇄동(문소동, 수정동 포함)에 원림을 직접 조영하였는데, 고산선생의 유적지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그 화려함을 생각하고 찾아갔다가 막상 이 원림을 대하게 되면 실망을 하게 된다. 유적지에는 순수자연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의 생활공간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림의 뜻을 이해하고 대자연에 몰입하여 고산선생을 느끼게 되면 비로서 그 앞에 펼쳐지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하여 고산선생은 "사군자의 처세는 나아가고 물러나는 두 가지 길일 따름이니, 조정이 아니면 산림이라 한 것은 곧 고인의 말입니다. 제가 이미 병이 들어 세로에서 행세할 수 없으니 수석에 소요하면서 여생을 마치지 아니하고 다시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자가 운곡[에 들어가고] 이자현이 청평[에 들어가며] 최고운이 가야[에 들어간 것]은 오래된 일입니다. 이원이 반곡으로 돌아가자 한퇴지는 서를 지어 찬양했고, 유지지가 여산에 살자 구양수는 시를 지어 훌륭히 여기었으니, 내가 어찌 이원과 여지지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또한 당세인이 어찌 구양수와 한퇴지에 미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사엽 같은 이는 "고산으로 말미암아 조선어의 미가 발견되고 조선어를 예술적으로 숭화 양양했다고 본다. 송강이 이미 그 가사를 통하여 더 없이 아름다움을 밝혀놓았거니와 고산에 이르러 한결 더 깊이 넓게 되고, 캐내어 그 아려(雅麗)함을 천명하였다. 한문이란 밀림 속에서 유교라는 정글 속에서 우리말을 찾기란 그 당시에 있어서 지난(至難)하다기 보다 불가능에 가까운 공부이었을 것인데 대담하게도 이것을 시험에서 훌륭히 성공하였다."

'산중신곡'의 작품들은 고산선생이 경상도 영덕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금쇄동에 돌아와 자연에 묻혀지낼 때의 소작(所作)으로 속세의 혼란한 사회를 떠나 자연과 친화하며 자연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오우가」는 자연을 노래한 시가(詩歌)의 압권으로 그 시상(詩想)이 탈속(脫俗)하여 선경(仙境)에 들어간 듯하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어부사시사' 40수는 고산선생이 65세 때인 1651년 가을에 보길도 부용동에서 지은 연시조(連時調)로, 원래 고려 때부터 세전(世傳)되던 「어부가」를 명종(明宗)때 농암(聾岩) 이현보(李賢輔)가 「어부가」 9장으로 개작하여 즐겼고, 퇴계 선생도 이를 탄상(歎賞)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음향(音響)이 서로 호응되지 아니하고, 말의 뜻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고산선생이 그 내용의 뜻을 풍부하게 더 넓히고 우리말을 사용하여 시조의 형식으로 개작(改作)한 것이다. 고산선생은 발문(跋文)에서 작시의 동기를 밝히고 있다. 원가(原歌)와 이현보(李賢輔)의 개작가(改作歌)는 한문(漢文) 고시(古詩)에 토(吐)를 붙인 정도에 불과하였으나 고산선생은 난삽한 한시구(漢詩句)를 순 우리말로 바꾸었으며 특히 기교면에서의 대구법(對句法)의 처리, 시간의 경과에 따른 시상(詩想)의 전개와 그 조화는 볼 만하다. 


고산선생은 국문학 특히 시조창작의 거봉으로서 선생의 시정신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자연과 합일된 경지를 개척하여 놓았고, 특히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시(詩)에 활용하여 성공한 작가이다. 본서(本書)는 고산선생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일편(逸篇)이며, 특히 권6 별책하는 시조문학을 연구하는 데 필독의 서(書)라고 할 것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본(本)은 책명은 ≪고산집(孤山集)≫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고산유고의 권6과 동일하다.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는 고산선생이 금쇄동에서 지은 작품집으로, 산중신곡(山中新曲)과 같은 12폭(幅)의 섭책본(섭冊本)인데 세로가 28.6cm 가로가 11cm 크기의 무늬가 있는 남색천(濫色紗)으로 된 표지에 금쇄동집고란 표제(標題)가 쓰였다. 1폭의 여백을 두고, 시조 3수가 실려 있는데 작품으로는 증반금(贈伴琴) 1수와 동발(同跋)이 실렸고, 이어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2장이 수록되었다. 그것은 곧 추야조(秋夜操) 1수와 춘효음(春曉吟) 1수다. 증반금은 선제후사(先題後寫)의 기사(記寫)지만 산중속신곡인 추야조와 춘효음은 선사후제(先寫後題)의 기사형식을 취한 것이 시본 산중신곡과 같다. 폭마다 괘선(掛線)이 쳐여져 있고 기사형식은 한글 표기로 된 연서기사법(連書記寫法)을 써서 세 줄박이로 되었으나 분구(分句)의 구분은 없고, 다만 분장(分章:首)의 구분만 되어 있다.


그리고 작품의 제작연대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시본 산중신곡과는 다른 점인데 증반금은 <백계 중추(白鷄 仲秋)>이라 되어 있고, 추야조는 <백계(白鷄)>로만 되어 있으며, 춘효음은 <적견(赤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본이 윤고산의 육필본이라는 점으로 보아 이러한 기록은 고산시의 창작연대를 고구(考究)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시본은 작품의 창작연대나 시의 원철(原綴)이나 원형(原型)을 상고하는데 절대적 고증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볼 때 증반금은 <백계(白鷄)> 곧 을유년(1645A.D) 중추에 지은 것이고, 추야조도 같은 을유년(1645A.D) 가을인 것이다. 그러나 춘효음은 그 이듬해인<적견(赤犬)> 곧 병술년(1646A.D) 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오우가>

                         - 고산 윤선도-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더하여 무엇하리 ~

 

구름빛이 맑다하나 검기를 자주하고 바람소리 맑다하나 그칠때가 많은도다

맑고도 그칠때가 없음은 물 뿐인가 하노라 ~

 

꽃은 무슨일로 쉬이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듯 푸르나나

이마도 변치않음은 바위뿐 인가하노라 ~

 

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이 지거는 소나무야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더냐

지하의 뿌리 곧은 줄은 그것으로 아노라 ~

 

나무도 아닌것이 풀도 아닌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비엇느냐

저렇게 사시에 푸르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

 

작은것이 높이떠서 만물을 다 비치니 밤중의 명광이 너 만한이 또 있으랴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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