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여행/영 남 권

영주의 <소수선원>과 <선비촌>

바위산(遊山) 2011. 5. 10. 15:12

 

선비의 고장 경북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서원으로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을 배향하는 사묘(祠廟)를 설립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1543년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1차 개명되었다. 1546년(명종)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을 10명으로 정하고,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 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였다.  백운동서원은 약30마지기의 토지와 18명의 노비 그리고 4명의 직원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된 기관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유생들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과거공부 위주의 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후 퇴계 이황에 의하여 과거를 위한 공부보다는 수기(修己)와 강명도학(講明道學)을 닦는 곳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황은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를 겪은 후, 관료로서 왕을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후진의 양성을 통하여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이끌 인재를 확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붕괴된 교학(敎學)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진흥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퇴계는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宋)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적송군락(赤松群落)>

신라인들은 적송으로 미륵을 빚어냈다. 그 중 하나가 일본으로 건너 가서 일본 국보1호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적송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일본 국보1호가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소수서원 입구에는 수령 300년 이상 된 적송들과 은행나무가 서원을 뒤 덮고 있다. 이 곳의 적송을 학자수(學者樹)라고 부른다. 적송처럼 꿋꿋이 자라 참 선비가 되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붙였다.

▲<숙수사당간지주(宿水寺幢竿支柱)>

백운동 서원이 설립되기 전, 이 곳이 절터이었음을 보여주는  숙수사당간지주(宿水寺幢竿支柱).  보물 제 59호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숙수사(宿水寺)는 세조3년(1457)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관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이곳이 숙수사의 옛터라는 사실을 이 당간지주 하나가 홀로 증명해 주고 있다.

▲<취한대 (翠寒臺)>

퇴계 이황이 이름을 지었으며,  푸른 연화산의 새로운 기운과 맑은 죽계의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에서, 옛시 송취한계(松翠寒溪)의 비취 취(翠)자와 차가울 한(寒)자에 인용되었다 한다.

▲<죽계천>

서원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으로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루어지는 관학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고려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소규모 서재(書齋)의 사학도 인정되었으며, 국가에서 그러한 사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고려말 조선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재의 성격이 단순히 유자의 안거강학(安居講學)의 장소였던 데 반해 서원은 안거강학의 기능뿐만 아니라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祀廟)를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는 특징을 가졌다.  

▲<경렴정(景簾亭)>

유생들이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지으면서 휴식을 취했던 정자다. 1543년 주세봉이 지었다. 정자안에는 몇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초서체의 현판은 퇴계의 제자이며 초서의 대가인 황기로가 쓴 것이며, 소수서원 편액은 명종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죽계천 건너편 큰바위에 새겨진 '백운동' 아래로 "경(敬)"이라는 붉은 글씨가 보인다. 敬이라면 유교의 근본 사상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敬일수도 있고, 서원의 창립자인 주세붕이 정축지변의 참상을 전해 듣고, 그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경을 직접 써서 음각하여 붉은 칠을 한 뒤, 여기서 정성들여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설도 있다. 또 하나의 설은 주세붕이 이 곳에 서원을 지을 때  주위에 흩어져 있던 불상 등을 죽계천에 내다 버렸는데, 소란스러워 이를 달래기 위해 敬자를 새겨 넣었다는 설도 있다. 바위의 하얀 글씨 백운동(白雲洞)은 이퇴계가 풍기군수로 있을 당시 직접 쓴 것이다. 백운동 서원은 소수서원으로 개명되기 전의 이름이다.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에게 지시하여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였다. 신광한은 "기폐지학 소이수지 (旣廢之學 紹而修之) "에서 "소수(紹修)"라는 이름을 차용하여 서원의 이름을 지었다. 명종은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란 친필 현판과 함께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이로써 소수선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다. 서원에 딸린 토지는 면세 혜택이, 노비에게는 면역(免役)의 특전이 주어졌다. 국가에서 인정한 최초의 사립학교가 되면서 정원은 10명에서 30명으로 늘고 ,생원 진사(生員,進士) 등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에게 우선 입학권이 주어졌다. 

문성공묘(文成公廟)는 안향 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후에 안보와 안축 그리고 주세붕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서원에는 학교 기능의 강학당(講學堂)과 제사 기능의 사당이 있다. 안향은 왕에게 청하여 모든 문무백관은 벼슬에 따라 금은포를 내게 하여 이를 일종의 육영재단인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인재 양성에 충당케 하였다. 이는 당시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안향이 전한 성리학은 우주론적인 기론(理氣論)보다는 심성 수양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인의 도는 충(忠), 효(孝), 신(信), 경(敬), 성(誠)이라는 실천 덕목에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윤리를 경시하고 의리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불교를 극력 배척하였다.

▲<영정각(影幀閣)>

영정각은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충렬왕 시절 고려는 고종말에 원(元)과 화친을 맺은 이래 대대로 몽고의 간섭을 받아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이 많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들과의 전쟁이 끝남에 따른 평화의 회복은 학문과 문교(文敎)의 재건을 가능케 하였다. 당시 원나라는 이미 송(宋)을 멸망시키고, 유학을 장려하던 시기이었다. 안향은 이러한 시기에 원나라를 왕래하며, 그 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우리나라에 전파한 최초의 성리학자다. 1289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를 직접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眞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왔다.

▲<학구재(學求齋)>

학구재는 학생들의 기숙사이다. 학문을 의미하는 "三"을 취하여 세칸으로 지었고, 공부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건물 모양이  "工"자 형태로 되어 있다. 학생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에 따라 두채의 학생 기숙사와 교수들의 숙소인 '일신재'나 원장의 숙소인 '직방재'에서 훨씬 물러나 동쪽에 치우치게 배치한 것도 이런 이유이다. 제자는 스승의 발치 아래에서도 잠 들수 없는 것이다.

▲<사료관>

 

그 밖에 '사료관'과 도서를 보관하던 '장서각' 이 있다. 장서각에는 임금이 직접 하사한 어제본(御製本)을 비롯하여 3000여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적은 좌우지선(左右之先)의 예에 따라 으뜸자리에 둔다 하여, 스승의 숙소보다 오른쪽에 배치하였다. 또한 제사에 필요한 집기나 비품 등을 보관하던 '전사청'이 있다.

▲<충효박물관> 

서원은 지방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제지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사설 교육기구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공인하에서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원은 선조 때에 들어와 사림파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미 명종 때까지 거의 20개에 가까운 서원이 세워졌으나 선조 때에는 50여 개의 서원이 세워지고 그 가운데 21개의 서원이 당대에 사액을 받았다. 

국가가 승인하는 형식인 사액의 경우 면세전 3결(結)과 노비 1구(口)의 사여가 따랐다. 그러나 서원은 설립 당초부터 그 지방의 사림으로부터 토지나 노비가 기증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시대가 내려오면서 서원이 사회적 위세를 지니게 되자 면세를 목적으로 납입되는 토지, 면역을 목적으로 투탁하는 양인이 많아져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초기의 서원은 대체로 그 건립이나 운영에 있어 향촌자치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그후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의식이 치열해지면서 서원의 설립에 중앙 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현상은 숙종대에 이르러 더욱 심해져서 각지에 서원이 남설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탁청지(濯淸池)>

탁청지는 선조 26년 (1593), 풍기군수 유운용이 서원 담장을 끼고 대(臺)를 쌓고, 그 아래에  연못을 만들어 경승(景勝)을 가꾸던 곳이다.

▲<시화전시장>

남설되는 서원은 봉사 대상 인물의 선정이 원칙에서 크게 어긋나는 경우가 많고, 가문의식이 강화되면서 서원의 남설을 초래하기도 했다. 후손이나 문중에 의해 설립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그러한 서원은 교육기구로서의 기능이 흐려지고 봉사 위주의 성향이 현저해진 상태에서 가문의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서원의 남설에 대해서는 1714년(숙종 40)에 첩설(疊設) 금지령이 내려지는 등의 제재조치가 행해졌다. 그러나 금령이 실천에 옮겨진 것은 1727년(영조 3)부터였다. 


그후 영조·정조 때를 통해 서원의 남설에 대한 억제정책이 계속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필요에 따라 신설 사액되는 것도 있었다. 19세기 세도정치기에는 정권의 기반이 사림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설 사액이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그 문란은 더욱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서원의 문란에 제동을 건 것이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조치였다. 대원군은 679개의 서원 가운데 47개의 사액서원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여 남아 있는 서원들은 대한제국 이후에 다시 세워진 것도 있으나 대부분이 47개소에 해당되는 것이다.

▲<죽계천>

소수서원 옆으로 '선비촌'이 있다. 예부터 이 곳 순흥지방은 경상도에서 가장 번창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 실패 후 이 곳의 3살 이상 주민은 모두 살육당하고 향교 등 모든 시설은 파괴되고 순흥은  그 이름조차 없어지며, 인근의 풍기나 봉화 등으로 나뉘게 된다. 선비촌은  그 때의 모습을 재현 한 곳이다. 

▲<선비촌전경>

 

▲<선비촌들머리>

 

 

선비촌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선비들의 정신과 몸가짐을 새롭게 이해하고 전달할수있는 장으로 할용하고자 영주선비들이 실제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재현한 곳으로 인성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및 고택숙박 체험을 할 수 있는 전통문화 테마 파크로  많은 학생들이 예절과 체험 학습을 받는 곳이다.

 

 

▲<우마차-대인 5000원, 소인 3000원>

 

▲<한옥숙박체험관>

 

▲<증설중인 선비촌>

 

여행일 : 2011년 5월 8일(일)

누구와 : 마누라. 아들

어데에 :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과 선비촌

 

 

 

 

▲<전통혼례>

 

 

 

 

 

▲<'추노' 촬영지 홍보물>

 

 

 

▲<박물관 들머리>

 

▲<박물관>

 

 

 

▲<죽계천(竹溪川)>

소백산을 발원지로 하는 죽계천은  낙동강 원류중의 하나이다.  세조3년(1457) 10월, 단종복위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 본거지이었던 이 곳 순흥의 백성들과 선비들은 토벌군에 의하여 몰살 당한다. 세살 이상의 남자는 모두 죽이라는 지시가 있었다 한다.  그 시신들이 죽계천에 수장되었고, 그 핏물이 20리 밖 안정면 동촌리까지 흘러가 그 동네를  지금도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이른바 정축지면(丁丑之變)이다.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도 있지만, 옛 선현들은 죽계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곳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안축(安軸)의 죽계별곡(竹溪別曲)이 유명하다.

▲<취한대 (翠寒臺)>

이렇게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둘러보고나니 점심때가 지났다. 이 곳은 특별한 별미는 없는 것 같다. 인근에 옛날 묵밥집이 있다. 때가 지났는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드는지 일하는 사람도 먹으려 하는 사람도 정신이 없다. 메밀로 만드는 묵밥은 1인붕에 6천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학서원인 소수서원은 최고의 목조건물로 유명한 무량수전이 있는 부석사와 함께 둘러 보면 좋을 듯하다. 

▲<서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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