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2011년 5월 8일(일)
누구와 : 마누라.아들
어데에 : 경북 영주의 <부석사>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을 통하여 전입된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 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의 화엄종이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중국 유학후 수도처로 삼아 안주하다가 뒷날 거대한 사찰을 이룬 곳이다. 그러나 부석사의 생김을 정리한 역사적 기록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비석에 쓰인 몇 문자나 절을 재건한 기록, 보수한 기록 등만이 전한다. 부석사가 세워지기까지에 관해 '삼국사기'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하며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일주문 지나 들머리>
그리하여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이 뜻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처음 절이 생겨날 당시가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는 아니었다.의상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소백산이나 태백산 등지에 초가를 짓고 불경을 강의하거나 토굴에서 화엄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은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의 부석사는 의상의 영정이 있는 조사당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몇 채 있는 아주 청빈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당간지주>
대규모 사찰 건립이 가능했던 것은 신림이 배출한 수많은 화엄대덕들이 국가로부터 상당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예컨대 부석사에서는 신라 왕의 상을 그려서 벽화로 걸어 놓고 있을 정도였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벽화에 그려진 신라 왕의 상을 보고 칼을 뽑아 내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태백산은 신라 오악 가운데 중사를 지내던 곳으로 흔히 북악(北岳)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의상의 법손들을 북악파라고도 하였다.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신라 하대에는 대석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가람으로 많은 대중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변하였고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출가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 <쌍석탑>
▲ <쌍석탑>
▲<범종각>
▲ <석등>
▲<정>
▲<우>
▲<좌>
▲<부석>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의상이 신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게 했고, 절터까지 따라와서 절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본래 이 절터에는 사교의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의상이 이 곳에 절을 세우려고 하자 선묘가 무거운 바위를 사교의 머리 위로 띄워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무량수전 옆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직도 떠 있다고 하며 부석사란 이름도 부석에서 따왔다고 한다.
▲<안양루>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부석사 동쪽 언덕에 있는 원융국사비의 건립 연대는 명문의 마멸이 심하여 확인할 길이 없으나 입적 이듬해인 고려 문종 8년 (1054)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의상 당대의 부석의 모습과 그의 법손들이 줄곧 이곳에 주석해 온 것을 알려 주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있다. 기타 고려 때 많은 부석사의 건물들이 중창되거나 창건 되기도 하였다.
▲<무량수전>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조사당 오름길>
명종 10년(1555)에 화재로 인해 안양루가 소실되었으며 선조 6년(1593)에는 조사당 지붕을 개수하였다. 선조 9년(1596)부터 11년까지 석린 스님이 안양루를 중건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는 폭풍우로 인해 무량수전의 중보가 부러져 중수하였고 경종3년(1723)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했다.
영조 22년 (1746)에 화재로 승당, 만월당, 서별실, 만세루, 범종각 등이 소실되었으나 그 이듬해에 중수하였고 영조 44년(1765)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했다. 일제 시대인 1919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허리 부분이 잘린 석룡(石龍)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조사당>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 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진입하여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맞배 형식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넉넉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1916년의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에 의하면 조사당은 고려 우왕 3년(1377)에 원응 국사가 재건한 것이다.
▲<선비화>
조사당에는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시던 지팡이를 뜨락에 꼽으니 선비화가 자라나와 의상대사를 모신 조사각 뜨락을 지키고 있다. 이 선비화는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도 푸르게 자라고, 절대로 조사각의 지붕 높이보다 더 자라지 않는단다. 나라의 국운이 흥하면 꽃을 피우고 나라가 어려우면 꽃이 피지 않는 단다. 이 나무의 잎이나 꽃을 따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서 사람들이 너도 나도 따가는 통에 지금은 철조망 속에서 보호되고 있다. 선비화의 학명은 골담초라 하며, 수염모양의 가시가 있다.
▲<삼성각>
삼성각은 칠성, 독성, 산신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의 수(壽), 복(福), 재(財)의 삼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현재의 삼성각은 원래 축화전(祝花殿)이라 불렀는데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라 한다. 1979년의 부수 때까지는 원각전(圓角殿)이라 하였고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모셨었다.
그 밖에 여러채의 요사채와 국보급 모물들을 지니고 있는 태백산 부석사는 소수서원과 가까이 있어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부석사 전면 조망>
▲<부석사빅물관>
노인전문정신과 전문
'산행.여행 > 영 남 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닭실마을과 권충제 관계유적지 (0) | 2011.07.28 |
---|---|
조물주의 걸작품 <가야산 만물상> (0) | 2011.05.22 |
영주의 <소수선원>과 <선비촌> (0) | 2011.05.10 |
우복동 전망대 <청화산.시루봉> (0) | 2011.04.07 |
청송의 소금강 국립공원 <주왕산> (0) | 2011.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