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여행/영 남 권

울진의 불영계곡과 성류굴 여행

바위산(遊山) 2010. 5. 23. 17:56

언   제 : 2010년 5월 22일(토)

날   씨 : 맑음

누구와 : 마누라, 아들, 주주(울 강아지)

어느곳 : 불영계곡 - 죽변항 대게회식 - 성류굴 

 

 

 불영계곡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서면 하원리 불영사에 이르는 광천에 발달한 계곡으로 15㎞ 걸쳐 이어져 있다. 예로부터 울진의 소금강이라고도 불리며, 깨끝한 계곡수와 기암기석이 수목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광천(불영천)의 감입곡류로 더욱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어 맑고 깨끗한 계곡에는 은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서 낚시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계곡의 암석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흰 빛을 드러내고 있으며, 길이가 12m나 되는 기암절벽을 이루기도 한다. 하천바닥은 깊게 파여 사발 모양을 한 구멍이 곳곳에 많다. 또한 크고 작은 폭포와 소가 주위의 울창한 수림과 어우러져 계곡미를 더해주며, 가을 단풍이 유명하다. 창옥벽을 비롯한 의상대, 산태극, 수태극 등으로 불리는 명소 30여 개소가 있다. 이곳에 사랑바위가 있다. 사랑바위(미륵바위)는 삼근리의 동쪽 마을입구 36번 국도변에 있는 높이 약4m의 바위로 몸통 하나에 머리가 2개로서 흡사 남녀(男女)가 포옹하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사랑바위라 부르고 있다. 이 바위주변에는 오래된 노송(老松)들이 있고 광천(光川)이 내려다 보이는 주변의 경관(景觀)은 절경(絶景)이다. 성황당(城隍堂)이 없는 이 마을은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믿고 있다. 사랑바위 근처에 안내판과 보호울타리, 벤취 등을 설치해 주변공터를 휴식공간으로 조성되어 있고, 사랑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촬영이 가능하도록 구조물을 설치하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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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바위에는 오누이의 애뜻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부모님들이 호환을 당하여 천애고아가 된 오누이가 서로 의지하며 약초캐는 일로 연명하는데, 어느날 꿈속에 신령님이 나타나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께서 병이 나시어 이곳 불영사계곡에서 자생하는 '삼지구엽초'를 구하고자 하나 산양들이 뜯어먹어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아주 높은 절벽 위에만 있으니 구해 온다면 큰 상을 내리겠노라!"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사흘동안 정성껏 기도를 하고, 계곡의 높은 절벽을 오르기를 이레만에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벼랑에 늘어진 '삼지구엽초' 를 발견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팔을 뻗다가 오빠가 실수로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누이는 사흘 밤낮을 슬피 울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뒤따라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말았다. 그 후 계곡에서 울리는 누이동생의 애절한 통곡소리가 하늘에 닿아 신령님이 두 남녀를 바위로 변하게 하여 평생 떨어지지 않게 포옹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통곡소리가 들리던 산은 "통고산(통곡산)"으로, 사랑하는 오누이가 떨어져 죽을 때 흘린 피가 묻은 소나무는 껍질과 속까지 붉은 "울진소나무(적송, 금강송)"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사랑이 이루어지고, 이별이 없다하여 오늘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져 오고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삼지구엽초'를 다려 먹으면 귀한 자식을 얻고 부부간에 금슬이 좋아진다고 한다.
 

 

사랑바위를 지나면 불영사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지나 15분쯤 걸으면 불영사가 나온다. 불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천축산불영사기(天竺山佛影寺記)에 의하면 651년(진덕여왕 5)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전한다. 의상대사가 동해로 향하고 있는데 계곡에 어린 오색의 서기(瑞氣)를 발견하고 가보니 연못 안에 9마리의 용이 있었다. 이에 도술로 가랑잎에 '火'자를 써서 연못에 던지니 갑자기 물이 끓어올라 용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친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뒤 의상대사가 다시 불영사를 방문할 때 한 노인이 '부처님이 돌아오시는구나'라고 하여 불귀사(佛歸寺)라고도 불렸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했는데, 1396년(태조5년)에 나한전만 빼고 모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소설(小雪)이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 다시 영산전만 남고 모두 전소된 것을 1609년에는 성원(性元)이, 1701년에는 진성(眞性)이, 1721년에는 천옥(天玉)이 중건했다. 현존 당우로는 응진전(보물 제730호)·대웅보전(보물 제1201호)·극락전·명부전·조사전·칠성각·응향각 등이 있다. 이밖에 3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양성당부도·불영사사적비 등이 있다. 불영사는 그 규모가 상당하고 지금도 계속 중창을 하고 있으며, 불영계곡을 끼고 있어 주변경관이 매우 수려한 때문인지, 연휴를 맞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올해 대학을 졸업한 아들놈이 아직 취업전이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지만 맘에 드는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객지에서 홀로 심란할 것 같아 같이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여행에는 볼거리와 함께 먹거리도 중요하니, 아들에 더하여 대게라면 사족을 못쓰는 마누라 포식도 시켜줄겸 울진으로 햔한다. 불영계곡과 불영사를 구경하고 때가 훨씬 지났으니, 죽변으로 향한다. 죽변항 '영덕대게,집에서 소주잔을 곁들여 대게로 포식을 하고, 어선에서 갓 내린 싱싱한 꽁치가 60마리에 2만원이라고 하여 소라와 함께 사서 차에 싣고는 방파제에 나갔다.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이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얼큰한 취기에 더하여 가슴시릴만큼 시원하다. 

 

 

다시 성류굴로 향한다. 성류굴은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석회동굴로 천연기념물 제155호. 총길이 약 800m, 주굴의 길이 약 470m, 최대너비 18m이다. 2억 5,000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굴의 명칭은 임진왜란 때 성류사(聖留寺:고려시대의 사찰로 임진왜란 때 소실)의 부처를 이 굴에 피난·보호했다는 데서 유래했으며, 경치가 좋아 신선들이 노는 장소라 하여 선유굴이라고도 한다. 그밖에 장천굴(掌天窟)·탱천굴(撑天窟)이라고도 한다. 시생대 변성퇴적층의 석회암지대가 용식작용(溶蝕作用)을 받아 형성되었다. 12개의 광장에 담홍색·회백색·백색을 띠는 종유석·석순·석주·종유벽 등의 다채로운 경관이 신비롭게 전개되어 지하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동굴 옆을 흐르는 왕피천의 침수로 수심 5m가 넘는 넓은 동굴호수 3개가 있어 종유석들이 수면에 잠기는 절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동굴의 하나로, 〈삼국유사〉에 신라의 원효대사가 이곳에 천량암을 짓고 수도를 했다는 기록과 고려말 학자 이곡(李穀)의 〈관동유기〉에 성류굴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굴 입구에 흩어져 있는 돌들은 임진왜란 때 성류굴로 도피했던 500여 명의 울진읍성 주민들을 몰살시키기 위하여 왜병들이 굴 입구를 막을 때 사용했던 것이라는 슬픈 사연이 전한다. 
  

  

 

동굴의 형태가 수평적인 횡굴이어서 관광동굴로 적합하나, 관광동굴로서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훼손이 매우 심하여 강력한 보호조치가 필요한 실정이다. 동굴 안의 온도는 15~17℃, 동굴호수의 수온은 15~16.5℃로 연중 변화가 없다. 삼척과 영덕을 잇는 국도와 봉화를 거쳐 영주와 연결되는 국도가 통과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석회종유석 동굴이 있고, 동굴의 규묘면에서는 작은 편이나, 그 수려한 모습은 어느 것에도 뒤지지 않는 것 같다. 

 

 

성류굴을 구경하고 시설지구에서 마누라 눈치를 보며, 아들놈과 부침게와 함께 막걸리 한 잔 하고 나니, 잔뜩 내려 앉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집으로 향하는 중에는 더욱 거세게 퍼 붓는다. 이제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부담감이 크겠지만, 언제나 평온해 보이는 수평선도 갯바위에 부딧히는 파도의 여울이 큰 것처럼, 살아가며 언제나 크고 작은 부딧힘으로 난관도 보람도, 아픔도 기쁨도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어느 곳에서나 거센 파도에도 굳세게 버티는 갯바위처럼 용기를 잃지 않고 희노애락을 벗삼아 굳굳하게 살아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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