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여행/영 남 권

구룡포와 호미곶에 다녀오다.

바위산(遊山) 2008. 4. 26. 12:13
여행지
영일만 과메기의 고장 구룡포와 해맞이 명소 호미곶
여행기간
2008. 4. 19(토)~20(일) 맑음
나의 평가
보통입니다보통입니다보통입니다보통입니다보통입니다
조선 명종때 풍수지리학자 "남사고"는 "산수비경"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키는 모습으로 백두산은 호랑이의 코에 해당하고 호미곶은 꼬리에 해당한다고 하여 천하의 명당이며, 한반도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호미곶의 일출장면은 "조선십경"에 속한다고 하였다. 한편에서는 거북이 꼬리라 부르기도 하고 토끼 꼬리라고도 불렀으나 이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일제의 잔재라고 한다.
토요일 비슬산 산행을 마치고 동료들과 헤어져 포항으로 향한다. 포항에 여동생이 살고 있어 늘 병석에서 답답해 하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남매들이 포항으로 집결하기로 하였다. 산행의 피로와 흐른땀을 해수탕으로 씻어내고 구룡포 한적한 해변가 횟집으로 향한다. 넓은 홀과 방이 넷이나 되는 횟집의 2층을 전세 내어 해물로 만찬을 즐긴다. 회와 전복과 대게까지 듬뿍 주문하여 푸짐한 안주에다 소주까지 곁들이고는 렌턴을 밝히고 방파제에서 낚시를 즐긴다. 나야 등산은 좋아하지만 낚시는 답답증이 나서 영 적성이 맞지 않는 것 같다. 밤늦도록 낚시를 하고 이튿날 느지감치 일어나니, 부지런한 매부와 조카들은 또 다시 방파제에 나가 낚시를 즐기고 있다. 그러나 물고기와 게임은 완패로 끝나고 말았다. 잡았다가 놓친 고기는 엄청나게 크다고 하는데, 잡은 고기는 겨우 송어 한마리던가? 미끼값이 고기값의 몇배는 되는 듯하다.
 
해변에는 부지런한 어부들이 어구를 손질하고 있고 해녀 한분이 물속에 들어가 해초를 뜯고 있다. 아마도 미역을 뜯는 것 같은데 잠시 끝날줄 알았던 미역작업은 점심때가 다 되도록 계속되었다. 아직 바닷물이 꽤나 차가울텐데 고생하심에 비하여 소득은 그리 좋지 않은 듯하다. 구룡포는 과메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겨울철이면 여기저기 과메기를 말리는 모습이 진풍경인데 봄부터 가을까지는 냉동과메기로 대신한다고 한다.
 
느지감치 복어탕으로 해장을 하고, 해안을 따라서 구불구불한 2차선 도로를 타고 호미곶으로 향한다. 새해가 시작되면 호미곶의 일출을 보러온 관광객의 차량으로 이 구불구불한 좁은 도로는 주차장이 되어 버린다. 지금 한창 도로확장공사가 진행중이니 앞으로는 교통이 좋아질 것 같다.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 들어서면 넓고 깨끗하게 정비된 주차장 앞으로 커다란 풍차가 보인다.
호미곶 광장에는 손을 조형화한 조형물이 한개는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한개는 바다에서 육지를 바라보며 서로 마주 서있다. 2000년 새천년을 맞이하여 갈등과 배타로 이어진 지난 천년동안의 "한손의 정신"을 청산하고 평화와 희망과 번영으로 온 인류가 화해하고 서로 돕고 함께사는 "두손의 정신"으로 나아가자는 뜻으로 조형화 하여 놓았다.
 

새천년 조형물 아래로는 1999년 마지막날 변산반도의 일몰로 점화를 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으며, 옆으로는 2000년 첫날 채화된 호미곶 일출의 불씨와 독도와 남태평양 피지섬의 첫 일출의 불씨도 점화되어 있다. 광장의 초입에는 특산품 전시장이 있어 각종 관광상품을 팔고 있으며, 왼쪽으로는 야외 공연을 할 수 있는 공연장이 있다. 따스한 날씨 때문인지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왔다. 공연장을 지나면 거대한 가마솥이 보인다.

손동상 옆으로느 연오랑과 세오녀비가 있다. 신라 "아달라왕" 때 동해바다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던중, 갑자기 바위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은 "연오"를 이상한 사람이다 하여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이리저리 찾아 다니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이 있는 바위에 올라가니 그 바위 또한"세오"를 싣고 일본으로 건너가 버렸다고 한다.
 
일본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왕께 고하니, 부부가 다시 만나게 되어 왕비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신라에는 해와 달이 정기를 잃어 빛이 없어지니, 일관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있던 해와 달이 정기를 잃어 빛이 없어진것은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과 "세오녀" 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들은 왕은 일본으로 사자를 보내어 두사람을 찾아 오도록 하였으나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나라에 온 것은 필시 하늘이 시킨일이니,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왕비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를 가져가서 하늘에 제를 올리면 예전과 같이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비단을 갖고 돌아와 "연오"의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예전과 같이 해와 달이 빛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 후 비단은 임금의 창고에 넣어두고 국보로 삼고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라 하였으며, 하늘에 제를 지낸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하였다 한다.
포항이 있는 영일만은 일본의 힘센 역사가 일본천하를 평정하고 일본에서는 겨룰 사람이 없어 우리나라로 건너와 전국을 다니며 대결할 자를 찾았지만 만나지 못하다가 포항의 운제산 대각봉에서 팔척거구의 조선의 "창해역사"를 만나 결투를 하게 되었고 이때 운제산이 흔들리고 먼지와 바람이 광풍을 일으키며 강물이 멈추어 흐르지 못할 정도로 싸우다 일본역사가 넘어지며 땅을 짚은 곳이 꺼지며, 동해바닷물이 넘쳐 들어와 호수가 되니, 지금의 영일만이라고 한다. 후일 일본역사는 창해역사 앞에 무릅을 꿇고 신하가 되었다고 한다.
등대 밑으로는 등대박물관이 있다. 포항은 고려시대때는 "연일벌" 또는 "형산벌"이라 부르다가 조선조에 와서는 "어룡사" 또는 "어링이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어룡사"는 지금의 포항제철이 자리하고 있는 형산강을 지나 20여리에 걸쳐있는 백사장으로 풀한포기 없는 황무지 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유명한 풍수지리가인 "이성지"의 매부가 연일현감으로 부임하자 매부를 방문차 이곳에 들러 유람 하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유명한 인사가 내려오자 이지방 사유들이 자리를 같이하여 한잔씬 권하자 얼큰해진 이성지는 이 지대가 범상치 않으니 서편의 운제산이 십리만 떨어진 곳에 위치 했드라면 반드시 수십만 사람이 운집해서 살 지대라고 하였으며, 지금의 위치라 하여도 조금 늦어지긴해도 반드시 큰 도시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지방 선비들은 한결같이 이 황무지에 어떻게 수십만이 사는 큰도시가 되겠느냐고 반대를 하자 "죽생어룡사 가활만인지" 라고 중얼거리며 떠났다고 한다. 이는 어룡사에 대나무가 서면 만사람이 모여 살곳이라는 뜻으로, 황무지였던 어룡사에 포항제철 굴뚝이 대나무처럼 서게되자 52만의 대인구가 모여사는 도시가 되었으니, 이성지의 예언이 신비하리만치 정확하지 않았나 싶다. 어머님이 긴 여행에 피로를 느끼시니, 더 이상의 관광은 접고 귀향을 서두른다. 앞으로도 일출의 명소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히 사랑받는 호미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바닷가에서 여유롭게 소풍을 즐기는 두 남녀의 모습은 한폭의 그림처럼 평화로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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