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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제2팔경 대흥사 원통암의 칠성바위(칠성암)

바위산(遊山) 2017. 3. 6. 15:30

 

3월의 첫번째 주말은 화창하고 포근하다. 좋은 날씨에 여행이라도 떠나볼까 하는데, 마누라는 청주의 초딩동창회에 간다고 치장이 한참이다. 할 수 없이 홀로 병원에 들렀다가 가 본지가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한 황정산의 원통암으로 향한다. 원통암은 단양의 황정산 영인봉 정상에서 300m 아래에 자리잡은 작은 암자다.  이 곳에 단양 제2팔경에 속하는 소원바위인 칠성암이 자리하고 있다. 

 

대흥사 골로 접어 들어 대흥사를 지나면 원통암으로 오르는 콘크리트 포도가 나온다. 구불구불 오르면 원통암 산행기점인 사방댐과 주차장이 나온다. 대흥사는 신라 때 양산 통도사의 건립 당시 창건하였다고 하며 전성기에는 총 202칸의 당우와 불상 10여구, 오백나한상 등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승려도 1,000여 명에 달하는 대찰이였다고 한다.                                                                         <대흥사>▲

 

그러나 1876년 소실된 뒤 오백나한상은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승려들이 와서 가져갔다고 한다. 당시 금강산에 있던 승려 497명이 8일 만에 이 절에 와서 오백나한상을 1구씩 등에 업고 유점사로 갔으나 남은 3구는 힘이 센 세 사람이 하나씩 더 지고 갔다. 그러나 유점사에 도착한 다음날 그 수를 헤아려보니 3구가 모자랐는데, 함께 업혀온 3구가 승려들의 무성의함을 원망하고 떠났다는 설화가 전한다.

 

 

 

 

 

부속암자로는 청련암(靑蓮庵)·원통암(圓通庵)·망월암(望月庵)·굴암(掘庵)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원통암과 청련암만이 남아 있으며, 청련암에는 이 절에서 옮겼다는 탱화가 있다. 대흥사는 절터만이 허허롭게 자리하고 있다가 근대에 들어 복원하고 중창하기 시작하여 조금씩 대찰의 면모를 찾아가고 있다.

 

 

 

원통암은 대흥사의 부속암자였으나, 대흥사가 폐사되고,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1353년에 나옹이 창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93년 의명이 중창하였다. 1787년 이후에는 불교의 탄압으로 인하여 거의 폐허화되었다. 이에 1824년 대연이 중창의 뜻을 세워 춘담의 재력과 달선의 도움을 받아 퇴락한 당우들을 복원하였다. 그 뒤 다시 퇴락한 것을 1949년에 중창하였고, 1965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통암은 관세음보살의 육근원통을 상징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옛날 이 암자 뒤의 절벽 석문에서는 술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욕심 많은 고을 태수가 하늘에서 내리는 술을 더 많이 나오게 하려고 구멍을 뚫자 술이 물로 변하여 버렸으므로 주민들이 원통한 일이라 하여 이 일대를 원통골 이라하고 암자를 원통암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들머리에는 몇개의 지게와 시주물이나 공양물을 보관하는 작은 함이 있고 불자들에게 이를 옮겨주길 희망하도 있다. 이는 높은 곳에 위치하여 물자를 옮기기 어려운 치악산 남대봉 아래 자리한 상원사와도 비슷한 현상이다.

 

사방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원통암으로 향한다. 영인봉 계곡을 타고 오르는 이 길은 매우 거칠고 험하였으나, 지금은 위험한 곳에 목조테크를 설치하여 오르기 좋게 만들어 놓았다. 해발 825m의 영인봉 정상에서 300m 아래 자리한 원통암은 주차장에서 1km정도만 오르면 된다. 임도를 타고 사방댐까지 차로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갈수기의 계곡은 말라 있는 곳이 많으나, 군데군데 해빙수가 쫄쫄 거리며 흘러 내리기도 한다.

 

<쭈~욱 원통암 오르는 길>▲

 

 

 

 

 

 

 

 

 

 

 

 

 

 

<얼어 붙은 폭포>

 

 

 

<올산>

 

 

 

등로 주변으로 제법 멋스러운 바위들이 자리하여 지루함을 덜어준다. 1km의 짧은 등로지만 이마와 등줄기에 제법 땀이 솟는다. 1시간 가끼이 오르면 원통암이 보인다. 오르는 중간에도 폭포가 얼어 붙어 있고 원통암 아래로 거대한 폭포가 얼어 붙어 장관을 이룬다. 그 빙폭위로 작은 암자 원통암과 칠성암이 서 있다. 그리고 오르다 가끔 뒤를 돌아보면 오똑하게 솟아 있는 올산이 보인다. 그리운 산 '올산' 그러나 산이 그리워도 나이 들고 부실한 허리가 산행을 망설이게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들어 부쩍이나 '우탁' 의 싯귀가 떠오른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드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의 마음이 이러하였을까? 부쩍이나 빠르게 다가오는 늙음과 백발을 가시와 막대로 쳐내려 하였음은 나이듬에 대한 허무와 무상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원통암약수: 예전처럼 술이 나왔으면 한 잔?>           

 

 

 

<원통암 빙폭>

 

 

 

<원통암과 칠성암>

 

원통암은 작은 암자다. 그나마 요즘들어 많이 정비된 곳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법당 내에는 석가여래좌상과 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절의 입구를 금포정(錦浦汀) 부도골(浮屠谷)이라 하는데, 이 골짜기 어딘가에 암벽을 파고 사리를 모셔둔 사리굴이 있다고 전한다. 이 밖에도 신보도사라는 백발노인이 도를 닦아 불법의 이치를 깨쳤다고 전하는 굴이 있는데, 암벽에는 '신보독서차동중’이라는 일곱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암벽과 마주보이는 곳에 '배석대'가 있는데, 승려들이 이 배석대에 모여서 서로 도를 닦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암벽을 향하여 합장하면서 절하였다고 '조선사찰사료'에 전해지고 있다.

 

원통암을 처음 창건한 '나옹화상'은 고려 말 승려 혜근의 호이다. 해인사에 보관된 목판본 '신편보권문'에 '나옹화상서왕가'의 작가로 이름보다 호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어려운 불교 교리나 수행에 관한 초보적인 사항을 되도록 쉬운 말로 풀이해 낮은 신분 계층의 신도를 광범위하게 끌어들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한마디로 "세상만사가 덧없으니 세상의 즐거움에 집착하지 말고 불교에 귀의하여 극락왕생하자는 내용이다.

 

원통암 들머리에 '나옹'의 싯귀가 적혀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음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젠장, '우탁'선생이 인생 무상을 말하여 가슴을 후비더니, 이제는 '나옹선사'까지 짜구 덤비어 홀로 산길을 걷는 외로운 산객의 마음을 더욱 허허롭게 한다. 원통암 옆 이정표에 영인봉 300m라고 써 있다. 영인봉에 올라 본지도 몇년 된 것 같은데, 영인봉까지 올라보자며 무거운 다리를 끌고 오른다.

욕심이 과했다. '춘래불사춘'이라! 산상은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고, 잔설 아래로 얼음이 얼어 있는데다 바위구간의 밧줄은 눈과 얼음이 얼어붙어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랜 산행경험으로 3월 말까지는 아이젠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뻔한 상식을 오늘도 망각하였다. 결국 몇번의 미끄럼질에다 제대로 한 번 나뒹굴고는 영인봉 정상 150m하단에서 포기하고 오던길로 하산을 한다. 무리해서 오르는 것도 욕심 때문이겠지, '나옹선사'의 말이 옳은 듯도 하다.

 

 

<영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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