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트마이 사원>
왓트마이 사원(킬링필드)은 주로 씨엠립 주변의 여러 희생자들의 유골을 보관한 곳이다. 킬링필드라는 이름보다는 새롭게 생긴 사원이라는 의미의 왓트마이사원 내에 작은 위령탑 형식으로 세워져 있다.'죽음의 들판'을 뜻하는 킬링필드는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좁은 의미의 '킬링필드'는 1975년 4월 17일 집권한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 정권이 캄보디아를 지배한 3년 8개월 10일 동안 학살, 기아 등으로 캄보디아인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이에 더해 1969~1973년 미군이 베트남군의 보급로를 끊는다며 캄보디아 북부에 폭탄을 대량 투하해 60~80만 명이 사망한 사건을 '1차 킬링필드'로 포함시키기도 한다.
또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즈 정권이 저지른 학살로 죽은 시체들을 한꺼번에 묻은 집단 매장지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캄보디아 전국에서 2만 여개의 집단 매장지가 발견됐다. 1963년 베트남전쟁의 후방기지 역할을 제공하는 미국에 대해 비동맹노선을 내세워 거부하고,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동부지역을 군수물자 루트로 이용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이 론 놀 장군을 지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시아누크 국왕을 쫓아냈다. 론 놀 정권(크메르공화국)은 극심한 좌익탄압을 벌였다.
<사원내에 안치된 가족묘: 부자일 수록 크고 좋은 납골탑을 세운다고 함>
폴 포트는 1968년 1월 바탐방 부대 습격을 시작으로 무장 투쟁을 개시했다. 크메르루주 세력은 점점 커져 1973년 크메르루주가 국토의 3분의 2를 점령한다. 이 내전 동안 론 놀 군대와 크메르루주 군 양측 모두 극도로 잔인한 행위를 저지른 탓에 사망자수가 엄청났다. 1975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병력을 철수하자 론놀 정권도 무너졌다. 4월 17일 크메르루주군이 수도인 프놈펜으로 입성했다. 내전으로 인해 대부분 난민 신세가 된 사람들은 향후 벌어질 학살은 예상하지 못한 채 폴 포트가 이끄는 군대를 해방군이라 부르며 환영했다.
폴 포트는 집권하자마자 '개조'에 착수했다. 그는 도시를 자본주의와 친미 권력의 온상으로, 농촌은 순수한 사회주의 평등사회로 간주하고 200만 명에 달하던 프놈펜 시민을 단 사흘 만에 모두 도시 밖으로 내몰았다. 프놈펜에서 밀려난 이들은 걷거나 오토바이 등을 타고 길게는 한 달까지 걸려 크메르루즈가 정해주는 농촌 지역으로 이동했다. 크메르루즈 집권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망자가 도시 소개 정책에서 생겨났다. 수많은 이들이 이주 도중 기아와 질병으로 숨졌고 크메르루즈는 노약자들을 방기하고 불평하는 자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적'을 색출하여 즉결 처분하기도 했다. 농촌으로 옮겨진 이들은 집단 농장에서 하루 두 끼의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농사일은 물론, 둑을 쌓고 논과 길을 만드는 강제노역을 수행했다. 공동취사를 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도 부모와 자식은 서로 분리되어 다른 지역이나 작업장에 배치됐다. 이들은 점령 한 달 후에 '긴급 현안 8개항'을 발표했다. 도시인구 소개, 시장 폐지, 통화 철폐, 승려직 폐지, 론 놀 정부 고위관료 처형, 공동취사 및 협동농장 설치, 베트남인 추방, 모든 병력 국경 배치 등이었다. 크메르루주는 1975년 5월 '민주캄푸치아' 수립을 선언하고 폴 포트를 총리로한 15인 내각을 결성한다.
크메르루주가 집권한 기간 동안 숨진 이들의 수가 얼마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연구에 따라 최소 15만명에서 120만 명, 200만 명 등이 수치가 엇갈린다. 200만 명은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다.1999년 공개된 미 공군의 폭격 기록에 따르면 미군은 23만 여회 출격해 네이팜탄, 고엽체, 집속탄 등 각종 폭탄 약 275만 톤을 쏟아부었다. 이 폭격은 60만 여명의 사망자와 200만명의 난민을 발생시켰을 뿐 아니라 곡물수출국이던 캄보디아의 농업 기반을 무너뜨렸다. 1975년 크메르루주가 집권할 당시 캄보디아의 식량 자급률은 20%를 밑돌았고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프놈펜으로 몰려들었다. 총 40만톤의 쌀이 부족했음에도 국제 원조는 중국의 1만 6000톤이 고작이었고, 아사자가 속출했다. <킬링필드희생자 유골탑▼>
크메르루주라는 이름은 1960년대 시아누크 국왕이 캄푸치아공산당(CPK)을 '붉은 크메르'라고 부른 데서 시작됐다고 알려진다. 크메르는 캄보디아인의 90%를 차지하는 민족의 이름이자, 앙코르왕조를 포함해 캄보디아의 원류가 된 제국의 이름이기도 하다.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캄보디아어로 상부조직을 뜻하는 '앙카'라고만 불렸다. 크메르루주 정권을 이끌었던 폴 포트의 본명은 살로스 사 이다. 1925년 5월 19일 프랑스 식민지였던 캄포디아 북부 캄퐁 통 지역의 비교적 부유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불교사원에서 6년 간 교육을 받았고, 1940년대 초 프놈펜의 기술학교에 진학해 목공을 배웠다. 이때 그는 호치민 휘하에서 프랑스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가하고 1946년 캄보디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킬링필드 희생자들의 유골>
폴포트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는데,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숙청'을 강조한 스탈린주의와 모택동 사상에 심취한다. 1953년 캄보디아로 돌아온 그는 10년간 프놈펜의 사립학교에서 역사와 문학을 가르치며 동시에 지하조직인 캄보디아 공산당 활동을 했고, 1963년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했다. 시아누크 정권의 비밀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그는 크메르족이 거주하는 북동부 산악지대로 피해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다. 폴 포트는 이 때 크메르족의 자급자족 생활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킬링필드' 중에서>
1975년 4월 17일부터 3년 8개월 10일 동안 캄보디아를 자신이 생각하는 농경 유토피아로 개조하며 '킬링필드'를 일으켰다. 폴 포트는 1997년 11월 타 목 군사령관 등 반대파에 의해 종신 자택감금형을 선고받았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 북부 안롱 벵 인근에서 가택 연금 중 1998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크메르루주는 다음날 그의 시신을 언론에 공개했으나, 자살이나 타살 가능성 등의 의혹이 제기됐다.
크메르루즈 이후 캄보디아는 30년간 훈 센 총리의 독재 하에 있다. 1993년 9월 총선 당시 캄보디아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제 1당인 민족연합전선의 지도자 노로돔 라나리드(시아누크의 아들)가 제1총리로, 훈 센이 제2총리로 선출되어 정부를 구성했다. 1997년 훈 센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라나리드 왕자를 축출하고 1998년 선거를 통해 단독 총리에 취임했다. 이후 훈 센은 30년 간 킬링필드의 공포를 적극 활용해 자신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하며 독재를 해왔다. 캄보디아 곳곳에서는 킬링필드의 현장이 관광지로 운영되고 있다. 대표적인 집단 매장지 중 하나인 쯔응아익에는 17층 높이로 쌓아올린 유골이 보관되어 있는 위령탑이 있다. 뚜올 슬랭 감옥은 고문박물관으로 전시 중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포함한 희생자를 찍은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또 오랜 내전은 캄보디아 전역에 지뢰를 남겼다. 특히 1970년 내전 당시 전국에 1000만 개 이상의 지뢰가 매설된 것으로 추정되고, 2011년 기준 약 400~600만 개의 지뢰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979년부터 2015년까지 지뢰와 불발탄으로 인한 사망자가 2만 명에 가깝고, 9000명 가량은 팔이나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캄보디아는 '킬링필드'를 자행한 이들의 처벌을 위해 유엔과 공동으로 ‘캄보디아 법원 내의 특별 재판부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과 훈 센 정권 사이에 협상 끝에 설치된 이 법정은 '국제전범재판소'가 아니라 캄보디아 국내법에 따른 특별 재판소에 불과하다. 법정 설치에도 긴 시간이 걸렸지만, 기소 내용을 두고도 비판이 적지 않다. 기소 대상을 크메르루즈 지도자로 한정해서 단죄 대상도 좁고, 그마저도 이미 고령이 되어 핵심인물이 다수 사망했다. 폴 포트도 1998년 숨졌다.
킬링필드의 상흔이 담긴 왓트마이 사원을 둘러보고 찾아 간곳은 근처의 박쥐공원이다. 공원의 키 큰 나무에 박쥐들이 새카맣게 달라 붙어 있다. 그러나 공원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중국의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에 실패하면서 권력 회복을 목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뿌리 깊게 존재하던 류사오치, 덩샤오핑 파의 영향을 제거하고, 낡은 사상, 문화, 풍속, 관습을 척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어린 홍위병을 선동하여 마오쩌둥주의자가 아닌 지도자들을 감금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문화대혁명은 교육의 마비, 역사적인 유적과 유산의 파괴, 전통 문화의 위상 악화, 종교 탄압과 함께 34,800명의 희생자를 발생시키며 중국 역사의 수레바퀴를 꺼꾸로 돌려 버렸다. 킬링필드의 주역인 '폴 포트'는 '스탈린'과 '모택동' 사상에 심취되어 당시 인구의 1/4를 희생시키고 캄보디아를 최빈국으로 만들어 미국의 캄보디아 공습과 함께 세계사에서 보기드믄 만행을 저질렀다.
사상과 이념이 만들어 놓은 참상을 보며, 아직도 분단국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내부에서 진보니, 보수니하며 이념으로 패거리지어 다투고 있는 우리를 되돌아 보게된다. 이제는 사상이나 이념보다는 팩트를 중요 시 하여야 할 것 같다. 옳음과 옳지 않음, 그리고 무엇이 우리의 미래를 영광되게 할 것인가에 몰두하여야 할 것이다. 왜? 멀고 먼 타국땅에서 '미이클 셀던'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단어가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지???
노인전문정신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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