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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곤의 재래시장과 <로카찬다 . 챠욱타지파고다>

바위산(遊山) 2014. 11. 29. 17:48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양곤의 변두리다. 산이라고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 드넓은 평야지대다. 그러나 식물이 자라기 좋은 아열대 기후와 우기면 매일 한 번쯤은 내리는 스콜의 영양으로 녹지가 발달되어 있다.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는 습관으로 호텔에서 묵는 3일간 이른 아침에 주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첫날은 너무 멀리 나가 호텔을 찾지 못해 30분 가량 헤메기도 하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길거리에 늘어서 있는 간이 음식점에는 손님들로 북적인다. 이곳 사람들은 집에서 아침밥을 해먹지 않고 거리의 간이식당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등교를 하거나  출근을 한다. 호기심에 들여다 보니, 푸실푸실한 안남미 쌀과 국수와 약간의 야채를 넣어 끓인 죽과 같다. 한 그릇 사먹어 볼까 하였으나, 식당의 위생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 포기하고 말았다.

건기의 도랑물은 폐수와 같았다. 검게 썩은 하수물은 하수시설과 정화시설의 부재에 의한 것 같다. 살기가 괜찮은 집은 그런대로 벽돌집을 지어 주거시설이 안정되어 보이고 위생상태도 괜찮아  보이지만 습지에 기둥을 세우고 지은 판자집은 안이 들여다 보일정도로 허름하고 나무로 다리를 놓아 출입을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용하는 생활용수는 정화되지 않고 그대로 도랑으로 흘러 나가 썩어 고여 있거나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강물도 대부분 진흙탕물이다. 그 곳에서 고기를 잡는 모습도 가끔씩 보인다.

양곤의 거리는 개들의 천국이다. 발정난 암캐를 찾아 모인 숫캐들이 군데군데 우글거린다. 시장에서도 쉽사리 개때들을 볼 수가 있다. 이 개들은 대부분 주인이 없는 것 같다. 이 덩치큰 개들은 매우 온순하다. 개들은 짖지도 않고 싸움도 하지 않으며, 사나운 표정을 짖지도 않으며, 사람들을 피하지도 않고, 먹을 것을 탐내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생긴 것은 개지만 부처와 같은 온화함이 있다.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의 인구가 500만이라면 이곳에 사는 개가 500만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렇게 개판이 된 것은 이 곳 사람들의 자비에서 비롯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굶지 말아야 한다는 불심에서 나온 자비로움으로 개들이나 새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준다. 전기줄에 줄지어 앉아 있는 비둘기들에게 창밖으로 모이를 던져주니 우루루 몰려드는 모습도 볼 수가 있었다. 또 하나의 자비로움은 아침이면 골목을 줄지어 행렬하는 승려들의 모습이다.

이 곳의 스님들은 우리나라처럼 사원이나 파고다에 기거하지 않고 별도의 수도원에 기거하며, 수도에 전념한다. 소승불교의 전형으로 수도에만 전념하지만 이들은 시민들에게 존경받고 있으며, 오랜 군부독재정권도 이들을 무시하지 못한다. 오랜 군부 독재의 폭정에 참다 못한 스님들이 거리로 나섰을 때에도 시민들은 군인과 경찰로 부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인(人) 울타리를 쳤다고 한다.

승려들은 아침이면 식기를 들고 탁발을 나가고, 그 탁발한 음식으로 하루 한끼로 때우고 수도에 전념하고, 다음 날이면 또 다시 탁발을 나간다. 전형적인 불교 국가로 승려들의 숫자가 많으나, 주민들은 이들의 매일 반복되는 탁발을 꺼리거나 불편한 기색없이 승려들의 식기를 채워준다. 뒤떨어진 경제와 열악한 환경속에 살면서도 자비와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불심에서 비롯된다. 현세의 욕심을 멀리하고 열악한 현실을 감내하면서도 오로지 내세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철저히 현세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본인들의 불심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다. 그것은 윤회의 영양에 따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미얀마의 치안은 매우 좋은 편이다.

아침을 먹고 찾아간 곳은 로카찬다 파고다와 차욱탓지 파고다다. 로카찬다 파고다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옥불을 모신곳으로 부처의 이빨이 보관되어 있다. 1999년 만달레이에서 발견된 1천톤의 백옥 원석이 발견되었는데, 발견자는 이를 정부에 기증했고, 정부는 사용처를 고심하다 이 불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옥으로 만든 이 불상은 처음에 발견당시부터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기적의 산물을 당시 수도였던 양곤으로 옮기기로 하고 강을 통해 만달레이에서부터 양곤까지 옮겼다. 그 시기는 우기였는데 백옥 원석을 옮기는 동안 비가 한방울도 내리지 않았다고. 그리고 원석이 옮겨지는 동안 이 원석에 손을 댄 이들의 병이 낫는 일들이 생겼다고 한다. 현재 불상은 발견당시 1천톤의 원석을 깎고 다듬어 500톤의 무게를 갖고 있는데 이 규모는 단일 옥으로 만든 가장 큰 불상이라고 한다.

미얀마의 사원은 부처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모두 맨발로 들어가야 한다. 신발을 벗고 신고 발을 닦기가 어려우니, 미얀마에 가실때면 샌들이나 슬리퍼를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허긴 이 곳 사람들이 거의 슬리퍼를 신고 다니고, 물가도 싼편이니, 한컬래 사서 신고 다녀도 무난할 듯하다.

양곤은 미얀마 남부 마르타반 만 북쪽으로 40㎞ 떨어진 양곤강의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미얀마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산업 및 상업 중심지이다. 삼각주 충적지대로 둘러싸인 낮은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주거지는 산마루 쪽에 있었으나 오늘날의 시가지는 충적지대에 위치했으며, 기후는 온화하고 습한 편이다. 기온은 1월에 16~18℃, 4월에 35~38℃ 정도이고, 평균기온은 27~29℃이다. 5~10월 중순까지 우기가 지속되며 연평균강우량은 2,500㎜이다. 지금은 비록 수도를 네피도로 옮겼지만 오랫동안 미얀마의 수도로 미얀마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도시다. 

양곤 강을 따라 자리잡은 정미소와 제재소들은 미얀마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주요산업은 직물·비누·고무·알루미늄·강철판제조 등 국영이지만, 양곤의 소규모 업체들(식품가공, 의류 생산시설) 대부분은 개인이나 협동조합 소유이다. 도시 중심지는 상점, 중개인 사무실, 잡화상들을 비롯해 은행·무역회사·사무실이 있는 상업지역이다. 도시 중심지 대부분은 3, 4층짜리 벽돌건물로 되어 있지만, 변두리지역에는 전통적인 목조건물들이 흔하다. 정부청사, 법원, 양곤종합병원, 세관 등은 식민지시대에 지은 붉은 벽돌로 된 낡은 건물이다.

<로카찬다 파고다의 옥좌불상>

 

 

도시 중심지 북쪽 지역에는 나무가 우거진 공원으로 둘러싸인 로열호(칸다우기이)가 있으며, 근방에는 시립동물원과 식물원이 있다. 보기오케 아웅산 박물관과 국립미술고고학박물관을 비롯한 박물관이 여러 군데 있으며, 운동경기장과 체육행사장도 몇 곳 있다. 양곤대학교와 한국, 미국 등 외국 대사관이 있는 거리는 양곤에서도 가장 정리되고 깨끗하며 녹지도 많이 조성되어 있다.

양곤대학은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대학생 시위대의 분산을 위하여 학교도 과별로 여러곳으로 분산시켜 놓았다고 한다. 미얀마의 무역 중심지로 해외무역의 8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쌀·티크·금속광석을 주로 수출하며 전국의 철도·수상교통·도로·항공 중심지이기도 하다. 북쪽 밍갈라돈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면적 199㎢이며, 인구는 5백만명에 육박한다.

<맨발의 노장들~>

 

 

차욱타치 파고다는 길이 67m, 높이 18m의 2000년 된 와불상이 모셔져 있다. 발바닥에는 욕계, 무색계, 색계를 뜻하는 108개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미얀마에서 4번째로 큰 와불상이 있는 파고다. 차욱은 ‘6’을 뜻하는데 6개의 불상이 모셔진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지금 보이는 불상 안에 5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파고다 내부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져 있는데 불상 조성에 힘을 보탠 이들의 이름이라고 한다. 자세히 찾아보면 한국인의 이름도 찾을 수 있고. 특히 일본인들의 이름이 몇개 눈에 들어온다. 이 파고다 불상의 특징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상이 치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스모키 화장을 연상시키는 메이크업과 붉은 입술이 인상적인 불상으로 다른 불상과 다르게 여성미를 풍긴다

<와불상 뒤에서 기도하는 승려>

 

 

다음에 찾아간 곳은 양곤에서도 가장 큰 시장인 보족아웅산마켓이다. 양곤의 아웅산 거리에 있는 영국식 시장으로 처음 시장이 들어선 것은 1926년으로, 원래는 양곤의 지방행정관이던 영국인 스코트의 이름을 따서 스코트 마켓으로 부르다, 미얀마가 독립하면서 독립영웅인 아웅산의 이름을 따서 보족 아웅산 마켓으로 부르게 되었다. 줄여서 보족 마켓, 아웅산 마켓이라고도 한다.

재래식 전통시장이지만 옆으로 현대식 백화점도 생겨나 과거와 현대가 믹서되어 있는 것 같다. 소시적부터 쇼핑은 나와는 거리가 먼 행위다. 물건을 구경하고 흥정하고 사는 것에는 애초부터 흥미가 없다. 오직 스스로 구매하는 것이 있다면 술과 안주와 담배뿐이다. 그래서 대충 둘러보고 카페의 테라스 그늘을 빌려 담배 한 대 피우고는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낸다.

다만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길 건너로 보이는 때가 꼬질꼬질하여 후질그레한 건물들이다. 가이드에게 "저 건물들은 돈이 없어 페인팅을 하지 않나?"하고 물으니, 가이드 왈~ "왜 칠을 하여야 하는지 조차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멈춰버린 시간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곳 '미얀마', 이제는 그들에게도 지난 60~70년대에 우리가 모두 힘을 모아 펼쳤던 새마을 운동같은 것이 필요한 때인것 같다.  

미얀마 하면 세계인들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인 '아웅산 수지' 여사다. 1945년생인 수지는 미얀마의 비폭력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서 미얀마 최대 야당인 민족민주동맹의 당수다. 독실한 불교신자이며 노벨평화상(1991)을 수상했다. 16년간 미얀마 군부정권에 의하여 가택연금을 받다가 2011년 가택연금이 해제되었다. 1947년 반대세력에 의하여 암살 당했던 미얀마 최고의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로 양곤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아웅산 장군이 암살당하였을 당시 수지의 나이는 3살에 불과했다. 1962년 버마에 쿠데타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군정이 들어선 이후 1988년 미얀마의 군사독재자였던 네원장군이 물러난다. 영국인과 결혼하여 영국에서 지내던 수지는 마침 그 해, 병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미얀마에 돌아와 있던 터였다.  

수지여사의 자택(굳게 잠겨져 있음)

 

 

'88년 양곤항만 노동자들의 파업을 신호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를 8888항쟁이라고 불리며 '62년 네원장군의 쿠데타 이래 26년 만에 벌어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였다. 유혈진압 닷새째 결국 군부는 지도부를 교체하며 정치 전면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실각 위기를 기회로 삼아 '88년 소마웅 장군의 신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무자비한 학살로 신군부는 정권을 재장악했다. 그때 아웅산수찌를 총비서로 하는 민족민주동맹( NLD) 만들어졌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 더 나아가 부처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아웅산수찌는 민주화 운동 와중에 정치에 입문한 셈이었다. NLD의 설립을 도운 후 '89년 7월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그녀는 해외로 떠난다면 자유를 주겠다는 군부의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아웅산 수지(미모였을 듯~ 미쓰에이 '수지'만은 못하지만>

'90년 총선에서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NLD가 495석 중 39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고 수지 여사는 총리가 되어야 했지만, 군사정부는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정권 이양을 거부한 채 독재체제를 이어 나갔다. 2005년 군부개혁파인 킨뉸 총리가 발표한 미얀마 7단계 개혁개방 로드맵에 따라 2010년 총선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총선은 야당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실시되었고 결국 여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총선 승리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미얀마 군사 정권은 2010년 11월지 여사의 가택연금을 해제했다. 2011년 5월 30일 양곤 저택에서 홍콩대 학생 및 교직원들과 가진 화상대화에서 미얀마 정치투어에 나설 계획을 밝히기도 했던 아웅산수찌는 그해 6월 20년 만에 자유의 몸으로 66회 생일을 맞았다. 이 자리에서 아웅산수찌는 NLD 본부에서 조촐한 생일파티를 갖고 "내 소원은 미얀마의 평화와 안정"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당시 이휘호 여사와 함께~>          <미얀마 국군의 행사에에 참여한 수지>

 

그녀의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연설이다. 이 연설은 “부패한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다.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를 부패시키고,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이러한 공포가 많은 세계 지도자들이 그들의 목적을 잃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믿었다. “정치가들은 참 놀라운 존재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치가들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라는 그녀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미얀먀 안에서도 수지에 대한 비판도 많은 모양이다. 군부와의 지나친 대립으로 미얀마의 발전을 저해시켰다는 평가다. 불자의 나라에서 자비로운 국민들의 생각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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