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한 번 가 보아야지 하면서도 피일차일 미루다 찾아간 곳이 여주에 있는 영릉이다. 날씨는 화창하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영릉을 한바퀴 돌아보는데도 땀방울이 줄줄 흘러 내린다. 여주의 영릉에는 세종대왕릉과 효종왕릉이 이웃하고 있어 산책삼아 같이 둘러보기에 좋으며, 어린 자녀들과 함께 가족여행지로 삼는다면 여행과 교육의 효과를 같이 할 수 있는 곳이다.
세종대왕은 우리민족사에서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임금으로 재위기간 동안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법(貢法)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했다. 또한 한글의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 태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다. 비(妃)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왕후다. 세종대왕릉은 사적 제195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원래 영릉은 소헌왕후가 죽은 1446년(세종 28) 광주(廣州)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왕이 죽자 합장했다. 이 능은 〈국조오례의 치장조를 따른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능의 석물은 병석에서 영저·영탁·지초문양을 배제하고 구름문양과 12지신상만 조각해 조선병석문의 기본을 확정했으며, 혼유석의 고석을 5개에서 4개로 줄이는 등 제도상 고친 것이 약간 있었다. 세조 때 이 영릉이 불길하다는 의논이 대두했으나 서거정이 "천장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고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1) 여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석과 석실의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합장했다. 능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임을 표시했을 뿐 상설제도는 단릉과 같다. 광릉에는 동자석주에 12지신상을 표시했는데 이보다 1년 후에 천릉한 영릉에서는 12지(支)를 문자로 기록했고, 그 이후에는 난간에 24방위까지 넣은 새로운 왕릉상설제도를 이루었다. 광주에 세워졌던 신도비는 능을 옮길 때 땅에 묻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옮겨놓았다.
<매운탕거리>
<재실>
<세종대왕릉>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907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영릉은 조선왕조 제17대 효종(孝宗·1619~1659)과 부인 인선왕후 장씨의 릉(陵)이다. 세종대왕릉 영릉(英陵)과 “같은 발음”으로 같은 경내에 불과 1km 이내이다. 영릉(寧陵)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쌍릉이다.
<세종대왕릉에서 효종왕릉으로 가는 길>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은 끝에 간단히 설명되어 있다. 조선 왕릉이 다 아름답지만 효종(孝宗)왕릉 영릉(寧陵) 역시 노송이 드리워진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산새들의 소리, 숲사이로 비치는 햇살, 조용한 분위기는 아취(雅趣)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신(神)들의 정원이라 불리우는 조선왕릉중에서도 영릉은 아름다움과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효종(孝宗)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효종은 인조가 왕이 되기 전 잠저에서 태어났다. 인조반정 후 봉작을 받아 봉림대군이 되었다. 인조(仁祖)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孝宗)은 둘째 아들로서 종통(宗統: 맏아들의 혈통) 상의 약점을 안고 왕이 되었다. 형이며 적장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효종은 자신을 왕세자로 명한 왕명을 거두고 형님인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元孫)을 왕세손으로 할 것을 울면서 간청하였다. 고 인조 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효종은 27세의 나이로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반면, 장자인 소현세자의 부인과 그 집안은 철저하게 몰락했다. 효종을 추종하는 신하들이 정치적인 후환을 없애기 소현세자의 후손을 “씨를 말리고” 있었다. KBS 드라마 “추노”와 MBC 드라마 “마의”의 시대적 배경에서 소현세자의 후손들이 효종(孝宗)으로부터 핍박당하는 장면들이 잠깐씩 나오고 있다.
문신(文臣) 김홍욱(金弘郁)이 효종 5년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사사(賜死)된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와 유배되어 죽은 소현세자의 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국문을 당하다가 맞아 죽었다. 효종은 왕위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효종이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지고, 1637년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볼모로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잡혀가 8년간 있었다.
<효종왕릉>
볼모생활 중 그 설욕에 뜻을 두어, 후일 왕위에 오른 효종은 청나라가 기대한 “동방의 착한 임금”이 되기를 거부하고 정 반대로 청나라를 치는 “북벌(北伐)”을 계획한다. 그러나 대신들의 비협조와 재정 빈약 등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즉위한 지 10년만인 1659년 41세의 나이로 죽는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청에 볼모로 있는 동안 아버지 인조(仁祖)로부터 친청(親淸)으로 의심받아 청나라에서 돌아와 1645년 갑자기 변사(變死)하였는데 역사의 일각에서는 아버지 인조가 독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릉(寧陵)은 처음 동구릉 건원릉 서쪽 능선(현재 구리시 동구릉에 위치한 영조 무덤인 원릉)으로 정해지고 그해 10월 29일 안장된다. 효종의 능이 동구릉에 정해질 무렵 이미 이장(移葬)을 고산 윤선도가 예언하였다고 한다. 당시 윤선도는 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년이 채 안가 효종능에 큰 변고가 있어 반드시 이장을 할 것이오. 이때의 임금은 효종의 아들 현종(顯宗1641~1674)이다. 현종은 재위 15년 내내 아버지 무덤 때문에 편안하지가 않았다. 거의 해마다 아버지 무덤 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현종은 죽기 일 년 전인 1673년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현재의 여주 땅으로 이장을 하게 된다. 효종(孝宗)은 북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졌지만 왕이 된지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효종의 귀 밑에 종기가 심각했고 이에 침의가 침을 놓아 처음에는 고름을 조금 짜내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효종은 한마디 유언도 없이 1659년 5월 승하했다.
효종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그해 4월 2일에 그는 작은 가마를 타고 창덕궁 후원(後苑)에 행차하여, 생의 마지막이 되어 버린 시를 읊었다. 雨後晴光萬綠新(우후청광만록신)-비 개인 뒤 맑은 빛에 온갖 초목이 새롭고 / 堂長少是君臣(당장소시군신)-한 자리에 모인 늙은이와 젊은이는 임금과 신하로다 / 花臺柳榭渾如畫(화대류사혼여화)-꽃과 버드나무 속의 누대와 정자는 마치 그림 같은데 / 時有鶯聲喚主人(시유앵성환주인)-때때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는 주인을 부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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