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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8경 신륵모종의 천년고찰 <신륵사>

바위산(遊山) 2014. 4. 27. 13:57

도드람산 산행을 마치고 찾아 간곳은 여주의 남한강변에 자리한 신륵사다. 집단시설지구를 지나 신륵사로 들어가는 초입에 라일락과 연상홍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北에서 南으로 흐르던 여강(麗江)이 몸을 풀어 은빛 모래밭을 빚고 기름진 옥토를 빚어 건설한 낙토(樂土)가 여주라고 하였다. 그 여주에 8가지 자랑이 있는데, 그 하나가 신륵모종(神勒暮鐘)으로 신륵사에서 울려퍼지는 저녁 종소리를 으뜸으로 꼽는다.

여주의 신륵사는 두어번 와 본 곳이다. 30년전 거래하던 무역회사의 야유회에 동참하여 여강 백사장에서 게임도 하며 줄거운 하루를 보낸 기억이 있다. 신륵사는 고찰로는 유일하게 강가에 위치한 명찰이다. 극락보전으로 바라보면 울울한 산세가 시야를 가리고, 일주문으로 들어서면 도도한 강물로 사바세계가 아득해진다. 그 모습이 얼마나 환희로웠으면, 숭유억불 조선시대의 문인 김병익은 " 신륵사의 아름다움을 어찌 유학자라 하여 폐할 것인가 "라며 찬탄하였다.

<집단시설지구>

 

 

신륵사는 화성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579~631 재위)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치 않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壁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절 경내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多層塼塔)이 세우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장실>

 

 

<전시장>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벌어진 이후의 일이다. 

1379년(고려 우왕)에 제자 각신(覺信) 등이 절의 북쪽에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하였다.

1382년에는 목은 이색 (牧隱 李穡)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하여 만든 대장경을 봉안하였다. 이 대장경은 조선의 억불숭유정책과 일본의 요청에 따라 일본에 보내졌고, 최근 한국과 일본의 승려들이 신륵사에 모여 화합을 도모하는 자리에서 그 대장경의 반환을 요청하는 모임도 있었다.조선에 들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3년에는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1671년이후 꾸준하게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도자기 가마>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조사당(祖師堂..보물 제180호),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 다층전탑 (보물 제 226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 石鐘. 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비 (보물 제229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석등 (보물 제231호)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원효대사와 9마리의 용에 관련된 창건설화와는 별도로 절 이름의 유래에 관한 두가지 설화가 전해 내려 온다. 하나는 고려 우왕시절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巖..실존함)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굴레를 의미하는 륵(勒)자를 써서 신륵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神力)의 신(神)과 제압의 뜻으로 륵(勒)를 합쳐 신륵사로 하였다는 설화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龍)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되는데,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江)을 다스린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것이다.즉 신륵사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의 의미가 짙은 사찰이다.

비보사찰(裨補寺刹)이란 신라말,고려초의 도선(道詵)이 체계화한 이론으로 밀교(密敎)의 택지법(擇地法)과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풍수지리설이 결합된  비보사탑사상(裨補寺塔思想)에 의하여 세워진 절을 이른다.  왕건은 도선을 국사(國師)로 삼아 통일을 이룩하였다.  

도선은 전국 산천의 역처(逆處)나 배처(背處)에 절을 세워 지기(地氣)를 보완해야 한다고 하여, 전국 3,00여곳을 지정하였다. 그 곳에는 어김없이 사찰을 세워 전답을 비롯한 많은 특혜를 주었고, 결국 고려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4대강 사업으로 강에 물이 가득하나, 예전엔 신륵사 맞은편에 너른 백사장이 펼쳐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놀이도 하고 공도차고 수영도하고 유람선도 타던 곳이다. 지금은 4대강 사업으로 이포보, 여주보, 강천보 등을 만들어 호수처럼 물을 가두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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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심었다는 향나무>

 

 

 

 

 

 

 

 

 

 

<세심정>

 

 

아래 그림은 조선 후기의 화가 정수영(鄭遂榮 . 1743~1831)이 그린 신륵사도이다. 그는 과거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지리학의 명문이었던 집안의 전통을 따라 기행(紀行)과 탐승(探勝)으로 일생을 보내면서 詩, 書, 畵에 몰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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