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천안문, 자금성, 이화원
구름한 점 없는 하늘, 따갑게 내려쬐는 양광은 북경의 여름을 달굴대로 달구어 놓는다. 오늘은 북경방문 첫번째 날이다. 처음 찾는 북경의 천안문광장은 7월의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로 붐빈다. 조금이라도 뜨거운 양광을 덜 맞겠다고 양산을 쓰고 모자를 사서 쓰고도 모자라 그늘을 찾아 걷는다. 넓은 천안문광장은 군데군데 공안들이 지키고 서있다. 이곳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나로서는 공안들의 모습에서 천안문사태나 파륜궁이 퍼뜩 떠오른다. 경제적 자본주의에 정치적 사회주의를 접목하여 실험주의 정책을 피고 있는 중국은 경제성장에 따른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언젠가는 표출될 것이고 다시 한 번 정치권력과 부딧칠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에 의문이 쌓인다.
천안문광장 앞으로 철도박물관이 보이고, 넓은 도로에는 차량들이 줄지어 달린다. 세계적인 대도시의 중심가로서는 아직은 여유있는 교통량이지만 그들의 성장을 볼때 머지않아 교통난이 가중될 것 같다. 광장에서 대로를 건너면 천안문이 장엄하게 서있다. 천안문 가운데에는 모택동(마오쩌뚱)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양쪽에는 각 中华人民共和国万岁(중화인민공화국만세), 世界人民大团结万岁(세계인민대단결만세)라고 쓰여 있다. 중국은 IT의 발달과 함께 복잡한 한자어를 컴퓨터화하기 위하여 개량한자를 많이 사용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와는 다른면이 있다.(이곳도 1949년 건국 당시에는 번체자로 쓰여졌던 글씨를 1964년부터는 간체자로 바뀌어 썼다고 한다.) 우리도 학생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발빠르게 간자체에 적응하여야 할텐데 실상은 그렇치 못한 것 같다.
천안문 광장에 처음 성문을 건설한 것은 자금성을 건설한 명의 영락제시대 1417년에 건설된 '승천문(承天門)' 이다. 1457년 낙뢰로 소실된 것을 1465년에 재건하지만, 1644년 이자성의 북경 공격으로 명조가 멸망했을 때 같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문은 청나라 순치8년(1651년)에 재건된 것으로, 이 때에 현재의 <천안문〉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한다. 천안문이라고 하는 명칭은 ‘천상의 평화로운 문’이라는 의미보다 만주어 명칭인 ‘천명을 받아서 안정된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며, 옛날 자금성의 북쪽에 있는 경산 위쪽으로 <지안문 地安門>이 있었다.
명나라, 청나라 두 왕조 시대에 큰 법률이나 명령을 공표할 때 최초로 이 문에서 발표되었다. 또 출전하거나 개선하는 군대를 황제가 알현하는 장소이기도 했으며, 1949년 10월 1일에 시행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식에서 모택동은 이 문 위에서 건국선언을 하였다. 그 후 이 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952년과 1970년에는 대규모 개수를 하였다. 5개의 통로를 뚫은 성벽 위에 목조 누각을 지은 중국의 대표적인 성문 건축이다. 누각 가운데는 현재, 중국 정부 요인이 여러 행사일에 천안문에 설 때의 전후 휴식을 취하기 위한 의자나 소파가 놓여 있다. 이전에는 성벽 5개의 통로 가운데, 중앙의 큰 통로는 황제용이었다. 길이는 27m, 현재는 중앙의 통로 이외는 닫혀 있을 때가 많다.
천안문광장 서쪽으로는 우리의 국회의사당과 같은 전국인민대표회의당이 있다. 정치적 사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중국의 권력구조는 중국정부를 구성하는 국가기관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 국가주석,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인민법원 및 인민검찰원 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중국의 최고 국가권력기관이라 할 수 있어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으나, 헌법에 “중국 내에 있는 모든 국가기관, 정당, 인민단체, 사회조직은 헌법과 법률을 넘어서 특권을 가질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어 과도한 권력집중에 따른 권력남용도 제한하고 있다.
중국은 다당제 체제를 갖추고 있으나, 대부분의 권력은 공산당에 집중되어 있으며 다른 소수당은 보완수준에 머무른다. 그럼에도 전인대의 권력창출과정은 형식적으로 국민에게 보여주는 역할에 그칠뿐, 하기휴가철에 전국의 정치권력자들이 휴양지에 모여 약 2달정도 각계파의 정강정책을 내놓고 토론하여 그 중에서 좋은 안을 선택하고 권력창출이 이루어지며, 전인대에서 형식을 갖추어 국민에게 발표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천안문은 자금성의 정문 같은 역할을 한다. 천안문을 들어서면 웅장한 자금성의 규모에 놀라게 된다. 자금성은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는 명·청대의 궁전으로 구궁[故宮]이라고도 한다. 높이 11m, 사방 4㎞ 길이의 담으로 둘러싸인 이 성은 현존하는 중국 최대 규모의 옛 건물로, 명나라 때인 1406~20년에 건축되어 그뒤 여러 차례 개축 및 보수되었다. 동서길이 760m, 남북너비 960m, 면적 0.72㎢이며, 크고 작은 궁실 9,000여칸이 있다. 가이드의 말로는 9,999칸으로 일만칸을 넘기지 않은 것은 일만칸은 신의 영역에 속하며 이를 침범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며, 자금성의 모든 방을 한칸에 하루씩 자면 27년이 걸려야 모두 자 볼수가 있다고 한다. 또한 바닥에는 두터운 돌벽돌을 겹겹히 깔고 후원을 빼고는 자금성내에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황제를 암살하려는 암살자들의 침입과 은거를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주요건축물인 우먼,전삼전, 후삼전, 선우먼은 베이징 시내구역 중심선상에 늘어서 있고, 나머지 건축물들은 그 양옆에 배열되어 있다.
기능에 따라 전조(前朝:궁정의 바깥채)와 내정(內廷)으로 나뉜다. 전조의 주요건물은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으로, 황제가 큰 제전을 거행하거나 신하를 만나고, 정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전당의 모습은 장대하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눈부시게 화려하다. 3대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건축물은 태화전으로 이는 한백옥(漢白玉)에 조각하여 만든 높이 8m의 석대 위에 세워져 있다.
신해혁명으로 중국 최후의 제정(帝政)이 막을 내리게 되면서, 1914년 앞부분의 건물들이 옛 물건들의 진열장으로 쓰이다가 1925년 구궁 박물관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구궁 박물관은 중국에서 가장 귀중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현재 국가중요보호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이화원 *************
이화원의 이름은 원래 청하원이었다. 천안문 광장에서 북서쪽으로 약 15km 거리에 위치한, 중국 최대의 황실 정원이다. 북경(北京) 해정에 위치해 있으며 중국에서 보존이 가장 잘 되어있는 고대 정원으로 3/4이 물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공 호수로 호수를 만드느라 파낸 흙으로 호수 뒷쪽에 산을 만든 엄청난 규모의 정원이다. 북경의 서북쪽에 있는 가장 큰 공원으로 공원의 구석구석까지 물을 끌어들여 경관을 높이고 있다. 전체 면적 290만m2 가운데 인공 호수가 4분의 3을 차지한다. 둘레 길이는 8km 정도이다.
이화원은 북경에서 볼 만한 곳의 하나로 한 바퀴 제대로 돌자면 거의 한나절이 걸린다. 계단 오르기가 다소 힘들더라도 만수산(萬水山)에 올라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화원은 원래 금나라 때 행궁으로 건조되었으며, 명나라 때는 호수 주변에 여러 개의 사원과 정자가 세워졌다. 청나라때는 역대 어느 황제보다도 황실정원의 조성에 더 많은 힘을 기울여, 곤명호를 확장하고 만수산에 여러 건물을 지었으며, 북경 서북쪽 교외에 조성한 삼산오원(三山五園)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날의 이화원이다. 1860년 영불 연합군은 북경에 침입하여 삼산오원에 불을 지르고 보물을 약탈했다. 1888년 서태후(西太后)는 해군 예산을 유용하여 크게 개축하는 한편 이름도 이화원으로 개칭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해군을 총괄하던 선제황제의 아버지 순친왕(醇親王)이 한편으로는 서태후의 비위를 맞추고, 한편으로는 아들이 실권을 가진 황제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해군 예산을 유용하여 은밀히 공사를 진행시켰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00년 이화원은 또 한번의 수난을 겪었다. 의화원사건을 빌미로 북경에 침입한 8개국 연합군이 문화재를 약탈하고 건축물을 대파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서태후가 서안으로 피신했다가 북경으로 돌아와서 중건한 것이다. 신해혁명 후 원세개의 '황실 우대 조례'의 규정에 따라 이화원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사유재산이 되었다. 청나라 황실은 1914년부터 입장료를 받고 이화원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1924년 부의가 황궁에서 쫓겨난 후 이화원은 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전체는 만수산(萬壽山)과 곤명호로 이루어지는데 이들을 배경으로 누각, 전당과 소나무, 잣나무, 노목이 자아내는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우며, 특히 눈에 덮인 풍경은 절경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중국풍 정원인 이화원. 곤명호와 만수산 언덕의 비경을 보듬어 안고 있는 청대의 별궁으로, 연꽃이 유난히 아름다워 서태후는 이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예전에 이곳을 가장 많이 이용한 서태후가 연극이나 음악을 즐긴 곳이기 때문에 황제의 의상을 빌려 입고 사진도 찍을 수 있다.
유람코스로는 황제가 정사를 돌보던 정치활동 구역, 생활거주 구역, 유람 구역 등 3구역으로 나뉜다. 동궁문으로 들어가 인수전(仁壽殿)을 중심으로 한 정치활동 구역을 관람한 다음, 인수전 뒤 쪽에 있는 광서황제가 거주하던 玉瀾堂, 광서황후가 거주하던 의예관(宜藝館), 서태후가 가주하던 (낙수당)樂壽堂 등을 둘러 본다. 다음으로는 총 길이가 무려 728m에 이르는 장랑을 따라 호수 주위를 걸으며 주변의 풍물을 구경한다.
장랑은 서태후가 산책을 하던 곳으로 그 자체로서도 이화원의 명물이며, 내부에 있는 그림도 좋은 구경거리이다. 인물, 산수, 꽃, 새 등을 그린 색채화가 8천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인물화의 전거는 역사상의 고사, 전설, 소설, 신화 등 그 취재의 폭이 매우 당양하며, 내용은 상고시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5천여 년을 포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도원삼결의(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낚시하는 강태공과 호랑이를 때려잡는 무송 등이 있다.
중
이화원을 가장 많이 이용하고 이화원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서태후다. 서태후는 청(淸)나라 함풍제(咸豊帝:1850~61 재위)의 황후로 효흠(孝欽), 서황후(西皇后),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라고도 한다. 동치제(同治帝:1861~75 재위)의 어머니이자 광서제(光緖帝:1875~1908 재위)의 양어머니로서 청국을 거의 반세기 동안 지배했다. 보수파 부패관료 일당을 기반으로 청을 철권통치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강력한 여성 지배자로 꼽히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와 친한 관료의 힘을 얻어 여동생과 함께 함풍제의 서열이 낮은 후궁이 되었는데 동생은 황제의 사랑을 받았지만 본인은 황제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어쩌다 관료의 도움으로 황제와 하루밤을 지냈지만 테크닉 부족인지 황제는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관료의 도움을 받아 북경에서도 유명한 기생집에서 2년간 남자를 다루는 기법을 배운 후에 황제의 사랑을 차지하게 되고, 1856년 황제의 유일한 아들 재순(載淳)을 낳았다는 일화가 있다. 황제가 죽자 당시 6세이던 재순은 동치제로 즉위했고, 국사는 8명의 원로로 구성된 섭정위원회가 주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와 함풍제의 정실 자안황태후가 교묘한 계략을 세워 결국 섭정을 넘겨받게 되었고, 전 황제의 동생으로서 의정왕이 된 공친왕이 두 태후를 보좌했다. 이같은 3인집정아래 정부는 일시적으로 활기찬 정책을 폈다. 중국 남부를 황폐화시켰던 태평천국운동(1850~64)과 북부 지방에서 발생한 염군의 난을 차례로 평정했다. 외국어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으며 근대적인 세관을 설치했다. 서양식의 군수공장을 세웠고 외교 담당부서를 최초로 만들었다. 대내적으로도 정부의 부패를 종식시키고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채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치제가 성년이 된 이후인 1873년 섭정은 끝났지만 서태후는 계속해서 국사를 장악했다. 심지어는 그녀가 젊은 황제에게 무절제한 생활을 하도록 유도하여 황제의 서거를 앞당기게 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군대의 힘을 빌려 제위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3세밖에 되지 않은 조카를 양자로 삼아 제위를 넘겨주었다. 결국 태후는 계속해서 섭정을 했지만 1881년 자안황태후가 갑자기 사망하자 서태후는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3년 후 그녀는 공친왕을 제거하고 그가 추진하던 개혁정책의 대부분을 폐기시켰다.
1889년 서태후는 명목상 자신의 권력을 정부에 넘겨주고 은퇴하여, 북경 북서쪽에 재건한 호화로운 이화원에서 기거했다. 그러나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898년 젊은 광서재가 개혁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를 쇄신·근대화하고 부패를 제거하기 위한 급진적인 계획을 추진하자, 수구파 관료들이 서태후 주위에 집결하여 군사력을 동원한 일격을 가한다. 새로운 개혁정책은 원점으로 돌아갔으며, 황제는 자신의 궁전에 연금되었고 서태후가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중국이 평화롭게 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무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듬해 서태후는 반외세적 성격의 의화단운동을 조장한 관료들을 지원했다. 1900년 의화단운동은 최고조에 달하여 수백 명의 외국인이 살해되었고, 베이징에 주재하던 외국공사관들이 포위되었다. 그러나 외국 연합군이 곧 베이징을 장악함에 따라 서태후는 베이징을 떠나 치욕스러운 강화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광서제는 아직 정부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1902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1898년에 자신이 무산시켰던 개혁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고 광서제는 사망을 하였는데, 그녀의 명에 따라 독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호수의 서쪽으로 돌로 만든 배인 청안방을 본 다음 유람선을 타고 맞은 편의 남호도에서 내리는 방법도 있으나, 오늘은 생략을 한다. 서태후는 5월부터 이화원에 기거하며 향락을 즐기고 색욕을 탐하며 군함의 건조비를 유용하여 움직이지 않는 돌배를 만들었다. 청나라 말기 잇따른 외우내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궁전 양식의 대리석 석방에서 파티와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옆의 사진이 돌로 만들어진 배인 청안방(淸晏舫)
만수산 전산 비탈 21m 높이의 거색기반 위에 건축한 불향각이다. 남쪽은 곤명호를 마주하고 북쪽은 지혜해불전을 등지며, 이 불향각을 중심으로 각 건축군이 매우 정연하고 대칭되게 양날개로 펼쳐지면서 서로 호응하여 마치 한마리의 박쥐모습을 하고 있다.1860년 불향각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그 후 원상태로 재건하였는데 이는 라마교의 건축물이다. 불향각 뒤쪽으로는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어 불교와 토속신앙이 공존하였던 것 같다.
청나라 당대 최고의 여성 권력자였던 서태후는 색과 향락을 즐기던 여황제였다. 그는 '황제가 3천궁녀를 거느린다면 황후는 3천궁남을 거느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국에서 호남아들을 색출하여 색정의 놀이개로 삼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참수하고 소문을 염려하여 그 일가족까지 몰살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한끼 식사는 쌀 45가마 가치의 달하는 금액으로 수백가지 음식을 만들도록 하였으며, 이화원을 중심으로 향락을 일삼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국방에 쓸 예산을 자신의 향락에 투입하여 결국 서방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의 멸망과 함께 중국역사에 치욕을 안겨준 인물이다. 지금도 중국에는 호주는 남성이나, 가정의 주권은 대부분 여성이 쥐고 있으며, 이는 서태후의 영양이 크게 미쳤다고 한다. 우리는 서태후의 정치 행적이 담겨 있는 역사를 둘러보며,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노인전문정신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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