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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이글거리는 중국의 북경여행

바위산(遊山) 2010. 7. 18. 11:53

 

중국여행-북경번화가 및 예술의 거리

 

인구와 면적을 통틀어 거대함을 자랑하는  중국의 정치·문화 중심지를 고수해온 북경(베이징)은 과거 8세기 이상을 중국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따라서 베이징에 대한 지식 없이 중국을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2,000년 훨씬 이전에 지금의 베이징 부근은 이미 중국 동북부 국경지대의 중요한 군사·교역 중심지였다. 원대(元)인 1267년 이곳에 대도(大都)라는 이름의 신도시가 건설되어 행정수도가 되었다. 명(明)의 제1·2대 황제 재위기간에는 난징[南京]을 수도로 삼았으며, 전대의 수도였던 대도는 베이핑[北平]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명의 제3대 황제는 베이핑을 다시 수도로 삼고 베이징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그후 베이징은 국민정부가 난징을 다시 수도로 삼았던 짧은 기간을 빼고는 계속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북경이 가진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1949년 이래로 불어닥친 현대화와 공업화의 바람에 의해 거의 파괴되었었다. 급기야 중국은 공업화에 밀려나는 고풍을 보존하기 위하여 베이징이 더이상 공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법안을 마련했다. 발전을 거듭하는 북경에서도 도시 일부에서는 불멸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훌륭한 건물들과 오래된 음식점, 전통 공예품 등에서 과거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찾아 볼만한 곳이 북경의 798예술의 거리다.  

북경의 대선자 지역에 위치한 798예술의 거리는 50년대초 소련의 건설지원과 동독의 설계지원으로 조성되어 무기와 공산품등을 생산하던 798국영기업과 전자공업지대에 위치한다. 우리가 그러 하였듯이 북경올림픽이 유치되며 북경의 도심을 장악하고 있던 공단과 노점상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며, 2002년부터 빈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 예술가 문화기구, 화랑, 예술센터,레스토랑이나 칵테일센터 들이다. 예술의 거리라 고풍스러움은 있지만 공장건물을 개조한 것이 대부분으로 정리되지 못하고 어수선한 느낌도 있으며, 이 곳 사람들은 관광객들을 향하여 예술품등을 구입할 것을 권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는 것이 가난한 사회주의 예술가들의 색채가 묻어 있는 것 같다.  

나의 예술에 대한 무지와 뜨거운 날씨로 인하여 예술의 거리를 둘러보는 것은 그리 흥미로운 일은 아니다. 대충 둘러보고 다음 여행지로 향한다. 중국은 우리 기준으로 보면 생활리듬이 느린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버스나 자전거로 통근하는가 하면, 무더운 여름밤에 시원한 바람을 쐬거나 잡담을 하기 위해 집 앞에 나와 앉아 있거나, 근처의 역사적인 명소들을 즐겨 찾고. 노인들이 작은 음식점이나 다방에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모퉁이의 선술집에 혼자 앉아 한 잔의 맥주나 마오타이주를 음미하는 것을 즐기는 풍경은 사라졌다. 그들은 우리들처럼 밤늦도록 2차, 3차로 술을 마시며 밤을 즐기지 않는다. 밤 10시 이전이면 아파트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는 것은 전력의 부족함도 있지만 사회주의의 느림이 자본주의 경제의 도입으로 경쟁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베이징은 명대 이래로 전통적인 중국 문화와 학문의 최고 중심지였다. 황제와 궁정귀족들은 예술, 특히 회화와 서예를 후원했으며, 다른 지방과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귀중한 물건들이 모두 수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비록 19세기 중엽에 시작된 정치적·사회적 대격변으로 인해 베이징에 전반적인 문화의 침체가 찾아왔으며, 이 문화 침체는 현대로 이어졌으며, 베이징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 걸쳐 확산되었다.

1949년 공산당에 패한 국민당은 엄청난 양의 보물급 예술품들을 타이완으로 실어 날랐다. 한편 본토에서 패권을 차지한 공산당 정권은 많은 가정에 상속되어 내려오던 가보(家寶)를 헐값에 사들여 외국에 팔거나 박물관을 채웠다. 1960년대초까지 중국공산당은 전통예술·수공예·학문 들을 장려했으나, 문화대혁명은 그 이전 시기의 모든 것들을 일소해버렸다. 그러나 1970년대말에 이르러 중국정부는 훼손된 보물들을 복구하고, 전통예술과 학문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북경은 다시 문화부흥기를 맞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의 명동과도 같은 북경의 번화가에 들러 백화점과 재래시장을 둘러본다. 외국인 관광객을 비롯하여 관광객들이 많은 편이기는 하나 평일이고 찌는 듯 한 더위로 인하여 거리는 그리 번잡스럽지는 않다. 깨끗한 거리의 간이매점 같은 곳에서 시원한 캔맥주 하나로 갈증을 풀고는 현대식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선 번화가의 뒷골목에 자리한 재래시장으로 들어선다.

  

우리나라의 먹자골목 같은 재래시장 골목은 갖가지 먹거리가 진열되어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굼벵이나 전갈 등의 곤충류를 튀킨 음식이 많이 눈에 뜨인다. 호기심에 작은 전갈꼬치 하나를 사서 먹어보니 고소한 맛이 우리가 맥주 안주로 이용하는 메뚜기를 기름에 튀겨 놓은 것처럼 느끼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아주 강하다.

한바퀴 둘러보고 북경오리로 저녁식사를 한다. 북경오리는 원나라 시대부터 전해내려온 북경의 전통 요리로 베이징카오야라고 부른다. 북경오리의 잘구어져 카라멜화된 껍대기는 바삭바삭하며 고소한 기름맛이 좋다. 구운 오리는 얇게 썰어서 소스를 찍어 오이채와 같은 야채와 함께 바오빙이라는 얇은 밀전병에 싸서 먹는다. 카오야와 함께 소고기와 야채를 후추와 소스를 넣고 볶은 헤이쟈오니요로우(흑숙우류)나 꿍빠오 소스로 버무려낸 새우요리인 꿍빠오샤와 마늘을 넣고 볶은 넓은 콩깍지인 수안롱허란또우 또는 사천성의 야채 피클인 스챤파오차이를 곁들여 먹기도 하는데, 오리를 많이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도 잘 맞는 것 같아 맛있는 저녁식사가 되었다.

 

 <북경올림픽스타디움>

북경에서 만리장성쪽으로 빠져 나가는 로타리에 이자성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이자성'은 1606년경 명나라 말기의 말기의 농민반란 지도자이다. 명나라의 '숭정제'가 즉위 후 기근과 반란이 차례로 발생하고, 후금군의 침공도 나날이 격해져갔다. 명장 '원숭환'이 후금군의 침공을 항상 방어해 왔으나, 후금의 홍타이지 책략에 걸린 숭정제가 원숭환을 의심하여 주살하자 후금군을 억누를 힘이 없어졌다. 이때 농민반란군의 우두머리였던 '고영상'이 백성들을 규합하고, '틈왕'이라 자칭하였으며, 뒤를 이은 이자성이 시안을 점거하고 국호를 '대순'이라 칭하였으며, 1644년 3월에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33세의 나이에 목을 매어 자살하고, 명나라는 사실상 멸망한다. 1664년 5월 후금의 도르곤은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공격하여 격파한 뒤, 베이징에 들어가 자신들이 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황조임을 선포하고, 같은 해 만주족은 후금에서 청(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이자성'은 베이징에서 '상주'로 달아났으며, 그의 군대가 계속 패퇴하고 유신들이 남경에 세운 남명(南明)이나 청에 투항하게 되고 이자성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그 후 몇번의 재기를 노렸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청세조실록'에는 이자성이 어려워지자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탈출하여 후난성의 석문 협산사에서 승려가 되어 1674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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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명나라의 멸망은 후금의 침공을 방어해온 명장 원숭환(袁崇煥)을 믿지 못하고, 적의 책략에 걸린 왕이 그를 의심하여 주살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통치자의 잘못된 판단 하나가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다. 또한 100일 천하로 끝낸 이자성의 멸망은 그가 농민들과 봉기하여 명을 망하게 하였지만 부족한 지식으로 한 나라를 통치할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그의 대형동상이 도심에 우뚝 서있는 것은 농민들을 선동하여 공산화에 성공한 모택동의 행적과 비슷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밖에 북경여행중 패키지로 자주 들리는 곳은 인텍스매장과 진주판매장, 보이차판매장 등이 있으나 , 꼭 필요하다면 품질, 가격등을 꼼꼼히 알아보아 충동구매는 자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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