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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소계림 용경협과 만리장성

바위산(遊山) 2010. 7. 11. 11:23

 

중국여행 - 백두산(장백산) 장백포에서 이어짐. 

  

워찌~ 이런일이......ㅠㅠ

오늘의 여행 일정은 만리장성을 다녀오는 것 외에는 비어 있다. 만리장성을 다녀와서도 머물만한 곳도, 구경할 만 한 곳도 없다.  결국 별도의 비용을 부담으로 가이드가 제안하는 용경협을 보러 가기로 하였다. 만리장성에서 버스로 용경협 입구에 도착하여 그 곳부터는 관광열차를 타고 댐의 하단부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다시 암벽을 따라 설치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댐의 상부로 이동한다. 용경협은 수청산 계곡에 높이 70m의 댐을 만들어 협곡에 물을 가두고 유람선을 띄워 놓았는데, 그 곳까지는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르도록 만들어 놓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입구는 거대한 용의 입으로 용의 몸통을 갈지(之)자 형으로 만들어 입구에서 출구까지 용의 입으로 들어가서 몸통을 통해 꼬리로 나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발상도 기발 하지만 이들은 개발의 가치만 있다면 모두 개발하는 것 같다. 댐에는 몇대의 유람선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70m라는 댐의 높이를 제외하고도, 호수면에서도 200~500m 이상의 높이로 삐죽삐죽 솟아 있는 암봉군락은 계림의 그것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운 비경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경협을 소계림이라 부르기도 한다. 용경협의 절반은 인공으로 만들어진 협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곳의 절경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댐을 쌓고, 물을 담아 뱃길을 낸 것은 사람들이었다. '장택민'이 이곳에 들렀다가 비경에 감탄하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개발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는 '등소평'이 황산에 올라 그 절경에 감탄하고 모든 인민이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도록 개발하라는 지시에 의하여 등로를 개발하게 되고 그러한 작업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호수의 정상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산 중턱에 하나의 커다란 돌이 튀어나온 것을 볼수 있다(아래 오른쪽 사진) 절벽에 붙어 떨어질듯 말 듯한 그 형태는 마치 여래불의 옆면을 닮아 사람들로 하여금 장엄하고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고 하여 “진산여래”(震山如來)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호반을 따라 삐쭉삐쭉 솟아 오른 암봉과 깎아 내린 듯한 절벽 사이 협곡을 따라 유람선이 유유자적 달린다. 오늘 북경의 기온은 섭씨 43도로 찌는 듯한 불볕 더위다. 그러나 협곡으로 둘러 쌓인 이곳의 기온은 북경보다 8∼10℃정도 낮다고 하여 햇살이 따갑긴 하지만 그리 찜통더위는 아니다. 협곡을 가로지른 까마득한 외줄에서 곡예사가 곡예를 부리고 있다. 이들은 관광객들의 눈요기 거리로 2명이 교대로 외줄을 타며 곡예를 하고 있다. 외줄 앞으로는 암벽에 설치한 번지 점프에서는 한 여성이 하강 준비를 하고 두려운듯 멈칫거리며 쉽게 뛰어 내리지를 못하고 있다. 번지점프장 뒤로는 용경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소형케이블카가 줄지어 오르고 있다.

유람선을 타고 가다보면 만나는 '봉관도'다. 3면이 호반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높이 60~70m로 정면에서 보면 그 모습이 마치 수탉이 엎드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관리들이 쓰는 모자를 엎어 놓은 모습으로도 보인다. 봄이 되면 들꽃이 화사하고 여름이면 풀섶이 무성하게 자라며, 특히 물속에 비친 그림자가 아름다우며, 주변의 암봉들과 어울려 독특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종산'의 절벽위에는 중국의 절대권력자였던 장쭤민 국가주석의 친필휘호로 龍慶峽江擇珉(용정협강택민)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몇개의 정자가 암봉위에 위태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호반을 돌던 배는 잠시 중간 선착장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다른배로 옮겨타게 된다. 선착장은 비교적 한산하고 몇마리의 오리때가 물위에 노닐고 있다. 진풍경이라면 오리때 아래로 물고기때들이 오리를 피해 달아나지 않고 같이 노닐고 있어서 이곳의 오리들은 시장하면 언제든 쉽게 물고기를 잡아 먹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용경협은 북경으로부터 85km, 만리장성 팔달령으로부터 20km정도 떨어진 곳에 북경시 연경현에 위치한다. 협곡에 댐을 쌓고 수자원으로 쓰려 하였으나, 관광의 가치가 더 높고 중국정부의 집중적인 관광개발에 힘입어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남방의 계림을 '어머니산수'라 부르는 반면 용경협을 '아버지산수' 또는 '작은계림'이나 '작은삼협'이라고 부를만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천주봉은 금강사의 서쪽에 위치한 봉우리로 암봉이 하늘을 받치고 서있는 것과 같다하여 천주봉이라 부른다. 

 

 

  

종산을 돌아가면 커다란 암봉사이에 끼어 있는 듯한 작은 암봉이 보이는데 이것이 '부벽산'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선원에서 신선 수련에 성공한 한 도사가 금강사의 한 스님과 내기를 하게 되었는데, 도사가 스님에게 '난 도끼로 12개의 산봉우리를 쪼갤 수 있네'라고 하자, 스님은 아무 말도 없이 웃기만 하였다. 두사람은 내기에서 진 사람이 이곳에서 떠나기로 약속하였는데, 결과는 도사가 도끼로 산을 쪼개다가 도끼가 돌속에 끼어 빼낼 수 없게 되자 그만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스님은 금강사에 계속 머물게 되고, 신선이 된 도사는 시선원을 떠나 세상을 유랑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고 전한다. 그래도 우리나라 명승지의 그렇고 그런 모방성 전설에 비하면 나름대로 창작성이 돋보인다. 우리나라 명승지의 관리자들도 좀 더 연구하여 참신한 내용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번지점프대가 있는 곳에 뒷쪽으로 금강사라는작은 불당이 있는데, 언제 축조되고 언제 소실되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원래 이곳에는 보물인 9개의 금항아리와 9개의 금환이 묻혀 있었는데 누군가에 의하여 도굴되었다고 한다. 1989년 당시만 해도 소실되어 얼마되지 않는 돌과 연자방아의 받침돌, 연화좌와 깨어진 석상들이 약간 있었던 것을 2006년 재건하여 관광객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월량만을 맞은편 골짜기로 뾰족하고 기다란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붓이 협곡의 깊숙한 곳까지 꽂혀있는 것 같다고하여 '신필봉'이라고 부른다. 여기도 역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진나라 때 "상곡군”이라 불리웠던 연경현에 예서체를 발명한 '왕차중'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이 그 사실을 알고 여러차례 입궁명령을 내렸으나 왕차중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격노한 진시황은 신하를 시켜 왕차중을 잡아들였으나 함양으로 압송하는 도중에 한 마리의 큰 봉황으로 변하여 다시 상곡군으로 돌아가 두 개의 깃을 송산(松山)아래로 떨어뜨려 대핵산과 소핵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서체를 발명한 그 신기한 붓은 공중에서 용경협으로 떨어져 하나의 봉우리로 변하였으니, 그 봉우리가 신필봉이다.

용경협의 겨울은 영하18도 정도로 호수가 얼어 붙는 관계로 유람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겨울이면 '빙등제'를 열고 얼음조각물과 함께 빙상을 즐길 수가 있다고 한다. 유람을 마치고 하산길은 도보를 이용한다. 하산하는 우회로는 암벽에 굴을 뚫어 통로를 만들고 이 굴을 따라 내려와야 한다. 환경과 보존에 집착하는 우리보다는 무엇이던 볼거리만 있다면 개발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부를 축척하려는 중국의 모습을 보면 영특하다는 생각에 앞서 섬뜩함마져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런지?

 

******************************** 만리장성 ******************************

 

여행기를 쓰다보니, 여행순서가 뒤바뀌었다. 우리의 여행 일정보다는 보는 사람의 편리를 위하여 가까운 곳이나, 설정이 비슷한 곳끼리 묶어 버렸기 때문이다. 연길에서 돌아와 북경에서 일박을하고 만리장성으로 향한다. 오늘 북경의 날씨는 43도로 찌는 듯 한 폭염이다. 그리 좋지 않은 미니버스의 에어컨은 워낙 더운 날씨로 그 성능이 현저히 감소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원찮은 에어컨이나마 가동이 된다는 것이다. 버스를 내리면 후끈하게 달아 오르는 열기가 폭염을 실감하게 한다. 만리장성 들머리부터 북적거리는 관광객들은 야심차게 장성의 정상부로 오른다. 그러나 폭염과 가파른 성곽의 계단길은 그리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숨을 헉헉대며, 점점 무거워져 가는 다리는 더 이상 전진을 거부한다. 힘겨움에 나도 모르게 쇠난간을 잡노라면 '아! 뜨거'하는 비명을 지르기 쉽상이다. 결국 만리장성의 상단에 오르는 사람은 극소수로 우리팀에서도 4명만이 정상까지 오르는 저조한 등정(?)실적으로 마무리 하였다. 

 

만리장성이 개방되어 관광객이 오를 수 있는 곳은 7곳 정도란다. 주로 케이블카로 오르는 코스를 택하지만 요즘은 고장으로 가동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만리장성은 보하이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약 6,400km(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다.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명대 특히 그 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동쪽은 보하이 만 연안의 산하이관[山海關]부터 중국 본토 북변을 서쪽으로 향하여 베이징[北京]과 다퉁[大同]의 북방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황허 강[黃河]을 건너며, 산시 성[陝西省]의 북단을 남서로 뚫고 나와 다시 황허 강을 건너고, 실크로드 전구간의 북측을 북서쪽으로 뻗어 자위관[嘉峪關]에 다다른다.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로 일만이천리가 조금 넘는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로 베이징의 북서쪽 바다링[八達嶺] 부근부터 쥐융관[居庸關]을 경유하여 다퉁의 남쪽 안먼관[雁門關]에 이르는 부분은 2중으로 축성되어 있다.

 

산하이관부터 황허 강에 이르는 부분은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외면은 구워서 만든 연한 회색의 기와로 덮여 있다. 이것을 전(塼)이라고 하는데 내부는 점토를 붙여 딱딱하게 만들었다. 바다링 부근은 높이 약 9m, 너비는 윗부분이 약 4.5m, 아랫부분이 9m가량이며, 총안(銃眼)이 뚫려 있는 톱날 모양의 낮은 성벽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약100m 간격으로 돈대(墩臺)가 설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황허 강 서쪽 부분은 전을 사용하지 않고 햇빛에 말린 벽돌을 많이 사용해 매우 조잡하다. 청대에 들어와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곳도 있다.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전국시대의 장성은 북방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중원에 나라를 세운 제(齊)·중산(中山)·초(楚)·연(燕)·조(趙)·위(魏)·진(秦) 등의 여러 나라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구축했다. 조·연·진 3국이 쌓은 북변의 성벽은 문헌에도 기재되어 있으며, 최근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츠펑[赤峰] 부근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에서 진대(晉代)에 이르기까지 5호(五胡)의 활동이 활발하게 되어 대거 중국으로 침입해왔다. 그들은 자유롭게 장성을 출입했고 내지에 정착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족이 세운 진이 양쯔 강[揚子江] 유역으로 남하하면서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다. 화북지역으로 들어온 선비(鮮卑)는 북위(北魏)를 세웠으나 급속히 중국화했고, 외몽골에서 일어난 유목민족인 유연(柔然)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장성의 개축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그 이후 방치되어 소실되어 가는 것을 몽골족의 침입을 막지 못하자, 가정연간(嘉靖年間) 이후 대대적으로 개축을 시작했다. 이 공사는 동부에서 착수되어 오늘날과 같은, 전으로 만들어진 견고한 장성이 만들어졌다. 서쪽 부분은 한대에 축성된 이래 거의 버려진 채로 있었으나 오르도스 남단의 장성에 이어 간쑤에 이르는 부분이 축성되었고, 이어 란저우[蘭州]에서 자위관까지 연장되어 오늘날 남아 있는 장성이 거의 완성된 것은 16세기말이었다.

명은 만리장성을 북방의 제1선으로 삼아 거대한 주둔군을 배치하고 구역을 나누어 방위를 담당시켰는데 이것을 구변진(九邊鎭)이라고 불렀다. 명대에는 만리장성을 변장(邊牆)이라고 불렀다. 북변의 변장 이외에도 요동(遼東) 변장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이 변장은 산하이관에서 동쪽으로 나아가 랴오닝 성[遼寧省] 선양[瀋陽]·카이위안[開原] 부근에까지 이른 뒤 남하하여 압록강 기슭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만주 및 몽골에서부터 신장[新疆]에 이르는 지역이 중국을 통일한 청의 지배하에 들어왔기 때문에 만리장성은 군사적 의미를 잃고 황량한 상태로 20세기 전반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래 정비사업에 착수하여 산하이관과 바다링이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과거의 만리장성은 오로지 판축공법(版築工法)을 써서 흙으로만 축조되었다. 황토를 건조시키면 단단한 점토가 되므로 판축은 간단한 공법이었으며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내구성을 갖고 있었다. 황토를 틀에다 넣어 건조시키면 햇빛에 말린 벽돌이 되는데 이것을 구운 것이 전이다. 전으로 장성의 외곽을 둘러싸는 공법은 명대 특히 16세기 후반 이후의 것으로서 지역적으로는 산시[山西] 동쪽 구간에 한정되어 있다. 산시 서쪽 구간에는 전 이외에도 햇빛에 말린 벽돌로 쌓은 부분도 있으며, 벽돌사이를 황토를 사용하지 않고 찹살풀을 사용하였다는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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