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제 : 2010년 7월 3일(토)
누구와 : 대한정병협회11명
날 씨 : 맑음(장백산 구름)
어데에 : 장백산(백두산과 장백폭포)
북경의 날씨는 뜨겁다. 몇십년만에 찾아 온 불볕더위가 도심을 불태운다. 방송에서는 4일 39도, 5일 40도라고 하였으나, 북경의 실제 기온은 4일 43도, 5일 45도까지 치솟았다. 그럼에도 정부에서 기온을 낮추어 발표하는 것은 40도가 넘으면 모두 휴업과 휴교를 하여야 하고 이에 따른 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일부러 낮추어 발표한단다. 그래도 크게 불평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이글거리는 태양열 때문인지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마져 끓어 오르는 듯한 느낌이다. 늦은 시간에 연길에 도착하여 호텔에 여장을 푼뒤, 마중나온 연변뇌병원 원장님과 간부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연길의 명물인 꼬치구이를 안주로 백두산 송이주와 맥주로 밤 늦도록 회포를 푼다. 꼬치의 종류도 다양하여 양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와 부속구이, 각종 야채 등을 쇠꼬챙이에 꼬여 숫불에 구워 먹는데, 그 맛이 일미로 모두 칭찬과 함께 많은 양을 먹어 치우고,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얼큰한 취기를 안고 술자리를 파한다. 두어시간이나 잦을까? 껄끄러운 입맛으로 대충 아침식사를 하고 장백산으로 향한다. 전날의 음주와 부족한 수면으로 자다 보다를 반복하는 차창밖 풍경은 꿈결처럼 느껴진다.
<새벽에 일어나 호텔 창밖으로 바라본 연길시>
연길은 현급시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행정중심지이며, 북한과 중국 국경지역의 북부 산악지대에 있다. 인구 40여만명으로 조선족이 약60%, 한족이 약40 정도이다. 19세기말까지 연길의 대부분이 미개발지역이었던 곳으로 1820년후에 중국인들이 불법적으로 이주해와서 살았으며, 1860년 중국정부는 러시아가 이곳을 잠식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이곳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이주금지조치를 해제했다. 그러나 이곳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국인은 소수가 이주해온 반면에 많은 조선인이 먹고 살기 위하여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1885년 특별관청이 설치되어 조선인 이주자들을 통제하고 세금을 거두었으며, 1895년 연길현이 설치되었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한국과 중국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던 곳이며, 1905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뒤부터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끊임없는 국경분쟁이 일어났던 곳으로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뒤에는 이곳의 통치능력을 키우고, 가파른 산비알에 화전을 일구는 우리나라 화전민들을 대거 이주시켜 갈대와 잡목으로 덮힌 들판을 개간토록 하였다.
연길에서 장백산으로 향하는 길은 광활한 농토가 펼쳐진다. 간혹 야산 같은 구릉지대도 있으나, 대부분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아그배나무에 북한종 배를 접목시킨 '사과배' 과수원은 아시아 제일의 규모로 800ha가 넘는다고 한다. 주요 농작물은 옥수수와 콩이고, 벼농사지대도 넓은 들판을 이루고 있으며, 간혹 감자나 기타 밭작물의 모습도 보인다. 연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요한 상업 중심지이며, 주변 농업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제2의 산업 중심지는 남서쪽으로 15㎞ 떨어진 용정[龍井]으로, 발전소 등이 있다. 연길은 중국내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이며, 한국어 라디오 방송국과 신문사가 있어서 우리나라 주요 방송사의 TV프로그램을 여과 없이 실시간 시청할 수가 있다.
장백산 북파입구에 들어서니, 북적이는 관광객들과 가이드들의 안내소리로 시끌하다. 7월의 초순인데도 이곳은 이제서야 은사시목 꽃가루가 바람에 흩날린다. 이곳에서 승합차량이나 지프차를 타고 천지로 오른다. 이곳의 운전사들은 구불구불한 가파른 임도를 일반도로 달리듯 과속을 한다. 산의 아래쪽에 분포한 잎갈나무와 가문비나무등 침엽수목지대를 지나면 중턱은 온통 흰 나무껍질을 입고 있는 자작나무 숲이 이어진다. 자작나무 숲이 끝나고 산의 상층부에는 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산판을 덮은 초원에는 들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담자리꽃'이라 불리우는 이꽃들은 마치 툰드라 지역의 여름 야생화처럼 산상으로 밀려오는 운무와 함께 푸른 초원위에 노란색 자수를 놓은 듯 아름답다.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민족의 성산(聖山), 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 읍루족,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 등도 자기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 전설화, 신격화했다. 그래서 백두산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에게도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 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과 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장백산 관리사무소>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하여 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하며, 명칭도 달리하여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백두산이라 부르고 있다. 연중 운무에 가려있어 30%만이 천지를 볼 수 있다는데, 오늘은 일진이 좋은 것 같다. 운무에 가린 천지는 그 모습을 감췄다, 보여주기를 반복한다. 멀리 운무 사이로 지금은 북한 영토에 속해 있는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이 고즈넉해 보인다. 젠장, 빼앗긴 영토에 찾아 오는데, 분단의 아픔까지 끌어 안고 이곳까지 이역만리를 돌아 돌아서 왔다.
<백두산 천지>
백두산 최초의 이름은 '불함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 개마대산(蓋馬大山), 태백산(太白山), 장백산(長白山), 백산(白山) 등으로 불렸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 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白)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 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천지 주변의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백두산 꼭대기 지표면은 40~60m 두께의 회백색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는 가스가 많고 폭발력이 큰 화산에서의 분출 마지막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공중 분출물이 떨어져 덮인 것이다. 부석은 고온의 마그마가 지상에 분출됨에 따라서 이에 용해되어 있었던 휘발성분과 수증기 등의 가스가 증발되어 바위 부스러기에 구멍이 많이 생기게 된 것으로, 가벼워서 물에 뜬다. 천지는 수면의 해발고도 2,190m, 평균수심 213.3m, 가장 깊은 곳 384m, 남북거리 4.85㎞, 동서거리 3.55㎞, 둘레 14.4㎞, 면적 9.165㎢로 매우 넓고 깊은 호수이다. 일반적으로 마그마의 분출만으로 이루어진 화구는 그 둘레가 2㎞ 이상을 넘지 못하나, 천지 둘레는 이보다 훨씬 길어서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매우 강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지의 총저수량은 20억t으로 그 가운데 70%는 빗물이며,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이다. 천지에는 물고기가 없었으나, 각종 물고기를 방류하여 보니, 모두 죽고 산천어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천지의 물은 중국측의 달문으로만 유출되어 장백(창바이)폭포에서 얼다오바이허를 흘러 쑹화강을 이루고, 압록강과 두만강으로는 지하수로서 유출될 뿐이다. 장군봉(2,750m) 부근의 해발고도 2,000m에 있는 백두폭포는 높이 18m, 너비 0.8m로 1단계에서 7m, 2단계에서 11m의 높이를 나타내는 2단계 폭포이다. 천지의 물이 지하수화해 용천수로 떨어져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1년 내내 흐른다. 중국의 장백폭포와 얼다오바이허 계곡에는 수온 37~82℃의 온천이 13개나 있고, 북한에서도 천지 남서부에서 수온 73℃의 온천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백두산 관리소 앞으로는 대문짝만큼이나 커다란 붉은색 글씨로 '조국이익극대일초(趙國利益極大一超)'라고 써 놓았다. 이는 '그 어느 것도 조국의 이익을 초월할 수 없다'는 뜻이다. 환경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천지까지 도로를 닦고 수많은 관광객을 유치하여 부를 창조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어찌보면 섬뜩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무섭게 질주하는 중국의 모습을 보면, 머지 않아 그들이 주장하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의 실현도 가능해 보인다.
경제부흥과 민주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은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과 개인과 집단이기에 편승하여 서로 밀고 당기고 뒤집기를 반복하는 소모전으로 앞으로 나가는 속도를 줄이고 있다. 이는 엄청난 비효율이다. 설악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우리 산하는 환경과 보존의 논리에 묶여 개발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설악에 케이블카 하나 설치 하는데 환경론자의 반대에 부딧쳐 30년이라는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차를 타고 쉽게 오를 수 있는 이곳에는 관광객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몰려오는 것에 비하여, 세계적 명산인 설악의 황홀경인 '용아장성' '공룡능선' 화채능선'이 텅비어 있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제는 개발과 보존이라는 상반된 구조에 효율을 보태야 될 것 같다.
<장백산 상단 고산 툰드라지대의 야생화>
<장백온천(전)과 북파등로 매표소(후)>
<아래가 소천지(펌)>
다시 백두산을 하산하여 북파입구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장백폭포로 향한다. 버스에서 하차하여 폭포까지는 20분쯤 걸어야 한다. 오르는 중에 소천지를 만나게 된다. 소천에는 전설이 하나 있다. 백두산의 한 초가집에서 유복자가 태어났으니 그의 이름은 복수다. 복수가 열 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복수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유언을 말해준다. 백두산에 갑자기 나타난 흉악한 용과 싸우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꼭 원수를 갚아달라는 내용이다. 복수는 원수를 갚기 위해 유언대로 심산에 올라가 도술과 무예를 닦는다. 9년을 노력한 끝에 장정에 되어 어머니를 찾아간다. 어머니에게 그동안 닦은 실력을 보여드린 후 원수를 찾아 백두산 봉우리로 올라간다. 갑자기 하늘이 흐리며 우박이 쏟아지고 먹장구름 속에 용 한 마리가 보인다. 복수는 뛰어 올라 용과 결투를 벌인다. 아슬아슬한 찰나에 복수는 용의 목덜미를 거머쥐고 절벽 밑으로 던져 버린다. 복수는 용이 천년 만년 시달림을 받으라고 바위를 쑥 뽑아 바위 밑에 깔아 놓는다. 복수는 바위를 뽑아낸 자리에 물을 채우는데 이것이 오늘의 소천지이다. 신기하게도 소천지에는 들어오는 물줄기만 있고 나가는 물줄기가 없는데 이는 바위 밑에 깔린 용이 물을 마시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온천지대>
<장백폭포 오르는 길>
<장백폭포>
폭포 옆으로 1박2일팀이 오르던 서파등로가 보인다. 계단을 만들어 등산로를 개설하고 위험방지를 위하여 뚜껑을 덮은 모습에서도 저들의 개발의지를 엿볼 수 있다. 며칠전 방송에서 백두산 화산폭팔이 임박했다는 우리나라 학자의 주장이 보도 되었다. 백두산 여러군데서 폭발 징후인 가스분출로 인 한 나무가 고사하고 있으며, 위성사진으로도 천지가 부풀어 오르고 있으며, 잦은 지진도 몇배 많아졌다고 한다. 2014년~2015년 쯤으로 화산분출시기를 예상하여 불과 몇년안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어느 학자는 발해의 멸망이 거란족의 침공에 의한 멸망이 아니고 1000년전 대규모 백두산 화산폭팔에 의한 재해로 동북아 최강의 발해가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장백폭포 왼쪽 암벽구간>
발해가 멸망했던 시점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었는데 갑자기 거란족에 의해 하루 아침에 멸망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갖게 되고 대규모 화산폭발 시기와 발해 멸망 시기가 맞물린데 근거한 주장이다. 백두산 화산폭팔이 일어 난다면 아이슬란드에 화산에 1,000~1,500배의 위력이 있다고 하며, 이는 중국의 동북부와 북한과 일본북부까지 막대한 영양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어느 학자는 당분간 백두산의 화산폭발 염려는 없다고 화산분출설을 일축하기도 하니, 지켜보아야 할 일이지만 만일에 대비하는 자세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서파등로 상단의 초원과 들꽃>
민족의 혼이 서린,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장백폭포를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 온다. 호랑이를 방목 사육하는 이 호텔의 이름은 '호림'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진달래'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저녁식사 중 외화벌이를 하는 북한예술단의 공연이 있다.
한복을 입은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반갑습니다' '아침이슬'등을 금영노래방기기에 맞추어 부른다. 약간의 팁을 건네보나, 아가씨들의 개인 수입으로 유용하게 사용될지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잃어버린 땅을 찾아 이역만리 멀고 먼길을 돌아 백두산을 찾는 것도 안타까운 일인데, 분단으로 헤어져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동포들의 모습은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만난듯 반가움과 이질감이 믹서된 듯하다. 그것은 마치 백두산의 장쾌한 아름다움에 민족분단이라는 서글픈 색칠을 한 것처럼, 여행의 즐거음에 비하여 더 큰 안타까움 같은 것을 만들어 놓는다. 정치도 사회도 이기에 물들어 아귀다툼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힘의 논리에 좌지우지하는 국제관계에서도 특히 영토의 문제는 부국강병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제 민족이 힘을 합하여 통일을 이루고, 빼앗긴 영토를 되찿아 쭉 뻗은 고속도로를 타고 백두산을 지나 연변의 푸른 들판을 마음껏 달려보고 싶다.
노인전문정신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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