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 생신으로 청주로 가는 길에 괴산의 산막이 옛길을 둘러 보았다. 산막이 옛길은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에서 호반을 따라 산막이마을까지 길이 2,030m, 폭 2m의 탐방로를 사업비 10억원을 들여 2008년 11월에 착공하여 만든 길이다. 칠성호와 수목이 어우러진 길에 790m구간의 나무테크를 조성하여 탐방객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쉼터 전망대 등을 조성하여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옛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연리지>
연리지란 두개의 나무가 자라면서 하나로 합쳐진 것을 말하며, 이곳에서 사랑을 기원하면 사랑이 이루어 진다고 한다.
<유람선 선착장>
<고인돌쉼터>
<괴산댐>
산막이 옛길의 탐방로는 괴산댐(칠성댐)옆에 자리한 외사리마을에서 시작된다. 마을을 지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선착장으로 향한다. 선착장은 나룻배처럼 작은 유람선이 얼어 붙어 있다. 해빙이 된다면 관광객을 싣고 칠성호를 유람할 것이다. 선착장에서 연리지(서로 다른 두나무가 자라면서 하나가 된 것)와 고인돌쉼터를 지나면 소나무동산으로 오르게 된다. 소나무동산에 오르면 우거진 송림사이로 그네와 밴취가 있어 칠성호반을 조망할 수 있다. 동산에서 송림 사이를 연결해 놓은 출렁다리를 타고 간다. 출렁다리는 산막이 옛길의 백미로 스릴과 재미를 더한다.
<소나무 동산>
<소나무 출렁다리>
시원한 조망을 즐기며 천천히 걷는 산막이 옛길은 여유로움의 줄거움이 있다. 걷다 보면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서면 칠성호가 한눈에 들어 온다. 얼어붙은 호반위에 눈이 덮혀 백색의 도화지처럼 되어버린 칠성호에 강아지와 함께 누군가 발자욱을 찍어 놓았다. 이곳부터는 테크를 걸어야 한다. 수목이 우거진 호반의 된비알에 탐방객의 안전과 편리를 위하여 나무테크가 설치 되어 있다.
뒤따라 오던 몇팀의 가족들은 탐방을 포기한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노령의 탐방객 두분이 앞서 가신다. 노령이지만 걸음걸이가 빠르고 날렵하며, 이곳의 역사와 유래에 대하여 해박하고도 장황한 설명을 자청하신다. 알고보니 이고장 문화해설가로 활동하고 계신단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서 객지에서 생활하시다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와 문화해설가로 활동하시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호반의 동쪽으로 군자산과 비학산이 우뚝하다. 비학산과 옥녀봉 사이에 칡을 캐어 먹으며 숨어 살기 좋다는 수려한 암반계곡인 갈은구곡이 있다. 원래 지금의 군자산은 비학산이었으며, 비학산은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가 패권다툼을 하던곳으로 군대산이었다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군자산이 군대산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산행정보에도 대부분 그렇게 표시됨) 결국 군대산은 비학산이 되고, 비학산은 군자산이 되어 버렸으니, 군대산도 없어지고 비학산도 없어진 격이라고 노옹께서는 탄식을 한다.
괴산댐은 1950년대 6.25 이 후 절대적으로 부족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건설된 수력발전댐이다. 지겹게도 가난했던 시절 예산 마련이 어려워 몇차례 공사가 중단되고 설계가 병경되고 나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비록 소규모의 발전댐이지만 우리 스스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평가 받고 있다.
테크를 걷다 보면 앉은뱅이 약수가 나온다. 느릅나무 줄기에서 졸졸 흘러 내리는 약수는 옆에 붙어 있는 먹는물 시험성적서가 있으니 안심해도 좋을 것 같다. 아무리 춥거나 가물어도 연중 마르지 않는 약수맛은 시원하니 일품이다. 그러나 요리 보고 조리 보아도 살아 있는 느릅나무에 인공으로 구멍을 뚫은 것 같아 발상의 기발함에 앞서 아쉬움과 찝찝함이 남는다.
<앉은뱅이약수>
<호수전망대>
<얼음바람골>
골짜기로 불어 오는 바람이 산막이 옛길을 걷는 사람들의 땀을 식혀주는곳으로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정도로 시원하여 얼음바람골이라 부른다.
<괴음정>
고공전망대는 40m 절벽아래 세워진 망루로 바닥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올라서면 공중에 떠있는 기분과 함께 아래가 훤히 내려다 보이고 호수로 빠질것 같은 느낌이 오금 저리게 한다.
<고공전망대>
<마흔고개>
테크구간중 가장 높은 곳으로 4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왼쪽은 절벽으로 수목이 우거져 있고 호수쪽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곳이다.
테크가 끝나는 지점에 산딸기 길이 있다. 산딸기 길옆으로 작은 골짜기에는 산짐승들의 발자욱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테크가 끝나고 완만한 골짜기인 이곳으로 산짐승들이 물을 마시러 오가는 길목인 것 같다.
예전에는 수려한 계곡이 흐르던 이곳은 지금은 호수가 되어 있다. 노옹께서는 저곳에 정자를 하나 지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말하신다. 괴산군수님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산딸기 길을 지나 봄이면 진달래가 붉게 산판을 덮는다는 진달래동산에 다다르면 산막이 마을이 나온다. 예전에는 30호 정도가 모여사는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달랑 3가구만이 살고 있다. 호반의 끝머리로 분지를 이룬 이 마을은 나름대로 적지 않은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는 것 같다. 이곳에 산막이선착장이 있다. 배라야 작은 나룻배 한척이 얼음속에 얼어 붙어 있다.
<산막이선착장>
<노수신적소>
산막이 마을의 끝으로 노수신 적소가 있다.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노수신은 중종38년에(1543)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이조좌랑으로 있다가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진도에서 19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 후 명종 20년 이곳으로 옮겨와 유배생활을 하던 중 선조가 즉위하자 2년만에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다. 생의 중요한 시기를 대부분 유배생활로 보내고 다시 영의정까지 오르는 천당에서 지옥을 오가는 삶이야 말로 생사를 걸고 당쟁을 일삼던 조선조 붕당정치의 폐해를 그대로 말하는 듯하다. 지금도 우리 정치인들은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도모하는데 힘쓰지 않고 정권창출과 당리에만 앞세워 국민을 편가르고 선동을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성들만이라도 정치논리에 휩쓸리지 말고 나라의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적소는 원래 아래쪽 연하동에 있었던 것을 댐건설과 수몰로 인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성씨가 노씨로 노수신의 후손이라는 문화해설가 노옹(翁)의 총알같이 빠른 해설을 들으며, 노수신적소 앞에서 얼어 붙은 호반을 건너 간다. 원래 지금의 칠성호수는 화양구곡, 선유구곡, 쌍곡구곡, 갈은구곡, 연풍의 풍계구곡과 제월리 고산구곡과 함께 괴산의 7대구곡 중의 하나인 연하구곡과 풍계구곡이 흐르던 곳이었다. 이들 구곡은 모두 중국에서 수려하기로 유명한 무의구곡을 본따서 이름 지었다고 한다. 괴산은 수려한 35명산이 널려 있고 명산 자락마다 아름다운 계곡이 널려 있는 곳이다.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달천천의 일원으로 제1곡은 탑바위로 아가봉 산자락 운교리 경계에 있고 2곡 뇌정암(벼락바위), 3곡 형제바위(3형제바위, 쌀개바위), 4곡 전탄, 5곡 사기암, 6곡 무담(무당소), 7곡 구암(거북바위), 8곡 사담과 9곡인 병풍바위가 있다. 지금은 탑바위와 9곡인 병풍바위만 물위에 일부 드러나 있고, 아름다운 6곡과 너른 백사장으로 이어졌던 사담은 모두 물속에 잠겨 있어 볼 수가 없다. 연하구곡은 조선조말 노수신의 후손인 노성도가 노수신적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연하동으로 들어와 구곡에 이름을 붙이고 구곡가를 지었다고 한다.(옆에 병풍바위 사진은 빌려온 것임)
얼어 붙은 호반을 건너면 도로변으로 괴산호 표지석이 나온다. 원래 칠성댐이 완공되고 칠성호라 부르던 것을 민원인 한사람의 항의로 괴산호로 개명하였다고 하는데, 문화해설가 노옹은 원래의 칠성호로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며 핏대를 올리신다. 노옹의 말씀이 맞는 것이 내가 소시적에 칠성수력발전소로 견학을 온 기억이 있는데 그때는 분명 칠성댐, 칠성호라고 부르고 있었다.
도로를 걸어 고개를 하나 넘으면 구진티가 나온다. 이곳에 작년에 표지석과 안내비를 만들었다. 구진티란 "굽이굽이 돌아가는 물가에 있는 고개"란 뜻으로 수몰 전 연하구곡이 이곳을 휘돌아 흐르며, 수려한 경관과 넓은 백사장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옛날 산막이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짖다보면 삿갓을 쓴 사람과 도포차림의 두사람이 자주 오고 갔는데, 이들은 조선의 조상이며 예언서 정감록을 쓴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정감록에는 피란지로 꼽히는 10승지가 있는데, 정감선생과 이심선생이 자주 왕래한 것으로 보아 십승지보다 좋은 곳이 비학봉마을이 아닌가 생각되어 진다고 써 있다.
그러나 문화해설가 노옹께서는 이 부분에서도 반론이 드세다. 사실 정감록은 작자 미상으로 알려져 있고 정감이나, 이심은 추상적 인물이다. 도포에 삿갓을 쓰고 이곳에 자주 들를만한 사람이라면 우암 송시열 선생으로 추정된다. 송시열은 연하구곡이 물에 잠길 운이라 보아 이곳에서 가까운 화양구곡과 선유구곡에 머물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분이었으므로 당연히 수려한 연하구곡에 자주 들렀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노옹은 추상적으로 표지석을 만든 향토사학자의 행위를 역사왜곡이라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내 개인적 견해로는 향토사학자나 관계관에서 좀 더 신비로움을 부각시켜 관광객 유치에 골몰하다가 생긴 헤프닝 같기도 하다.
구진티에서 다시 호반을 가로질러 주차지인 선착장으로 건너간다. "불그레한 구름이 창가에 비치고 구곡에 아침햇살 비치니, 세상에서 뛰어난 산수다.(중략) 노니는 사람은 바람과 안개를 좋아하며 시조를 읊조리고, 신선은 구름과 노을에 살면서 즐기는 것을 좋아하니, 연하동은 가히 시선이 별장으로 삼을 곳이다." 라는 노성도의 싯귀를 새기며 산막이 옛길 탐방을 마친다. 탐방시간은 왕복 또는 한바퀴 돌아 보는데 2.5~3시간 정도 소요된다. 해설과 함께 동행하여 주신 노옹께 감사드리며, 후일 다시 찾아 막걸리 상 차려놓고 한 잔 같이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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