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오지의 명산전망대 장산에 오르다.
여행기간
2009년 6월 6일(토) 맑음
나의 평가
한반도에서 산수갑산, 무주구천동과 함께 3대 오지로 꼽히는 영월 상동의 구래는 고산준령이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해발 1,408.8m 장산이 장쾌하게 우뚝 솟아 있다. 남서는 암벽이 옥동천을 향해 곤두박질 칠 듯 단애를 이루고 북동으로 부드러운 육산이 원시림 같은 울창한 수림을 품고 있는 산이다. 오지의 산으로 주변의 태백산이나 함백산의 명성에 가려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아직은 산객이 적어서 한적한 산행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비알이 급하여 오르기가 녹녹치 않은 산이다. 텅빈 듯 쓸쓸한 구래에 도착하니, 백운산이 이름을 말하듯 흰구름을 머리에 이고 우뚝 솟아 있다.
중석(텅스텐)광산으로 명성을 떨치던 이 오지의 산골마을은 2만여명이 모여 살던 활기찬 마을이었다. 그러나 중석광산이 폐광을 한 후 사람들은 생계를 위하여 하나둘 이곳을 떠나고, 광산에서 사택으로 사용하던 연립주택은 텅비어 폐가의 몰골을 하고 있으며, 도로변의 상가도 주택도 대부분 텅비어 버렸고, 몇몇 노인들만이 썰렁하게 마을을 지키고 있다. 구래초교를 지나면 두개의 암봉으로 되어 있는 꼴두바위가 나온다. 꼴두바위 주변은 공원화하여 깨끗히 조성되어 있으며, 바위 밑으로 사당과 함께 사당 옆으로 무릅을 꿇고 기도로 하는 여인상이 있다.
옛날 구래리에 젊은 부부가 노모를 모시고 주막을 꾸려가며 살고 있었다. 주막에는 손님들이 많이 들어 돈은 많이 벌었으나, 자식을 갖지 못하여 시어머니의 구박과 함께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며느리는 도승을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스님, 저희 부부는 결혼을 한지 10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자식이 없으니, 아들 하나만 점지할 수 있게 해 주십시요"라고 하였다. 도승은 "꼴두바위에 올라가서 석달열흘동안 치성을 드리면 자식을 얻을 수 있지만, 대신 주막에 손님이 끊겨서 가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요" 라고 하였다. 며느리는 자식을 얻고자 꼴두바위에 올라 하루도 쉬지 않고 치성을 드렸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손주는 얻을 수 있으나, 다시 가난해진다는 말을 듣고 며느리에게 밥도 주지 않고 구박을 하였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학대를 견디다 못하고 백일을 채우지 못하고 한을 품고 죽고 말았다. 그 후 하늘에서 이 여인을 대신하여 꼴두바위로 하여금 중석을 잉태하여 한을 풀도록 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은 며느리를 불쌍하게 여겨, 돌로 "꼴두각시"를 깍아 놓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한다. 이 꼴두각시는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에 의하여 파손 되었다고 전한다.
<꼴두각시사당>
<망경사>
"송강" "정철"이 오지의 첩첩산중인 이곳에 들렀다가 꼴두바위를 보고는 "바위로 인하여 만인이 모여 살 곳이라"고 하였는데, 공업화가 되기 이전의 어려웠던 시절에 중석광산이 생기고 이를 수출하여 외화벌이의 한 몪을 차지할때는 2만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살았으니, "정철"의 예언이 딱 맞아 떨어진 것 같다. 비록 100년지계를 누리지 못하였으나, 세계적으로 중석 등 자원고갈로 몸살을 앓고 있으니, 다시한번 광산업을 재개하여 예전의 번성을 기대해 본다.
"꼴두바위"를 떠나 콘크리트 포도를 10분정도 오르면, 망경사를 못미쳐 작은 석굴이 하나 있다. 자연적인 것은 아닌 것 같고 인공으로 조성된 것 같은데 광산을 발굴하기 위하여 시굴을 한 것인 것 같기도 하다. 굴은 입구가 작고 좁으나, 안이 어두워서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이곳이 서봉으로 오르는 능선길과 절음박골을 거쳐 산재당을 지나 장산으로 오르는 갈림길이다. 어느쪽으로 갈까 망서리고 있는데 한팀의 산객들이 몰려 온다. 지금은 폐촌처럼 삭막해져 버린 구래의 동창생들이 객지에 나가 살다가 모처럼 모여 고향의 뒷산인 장산을 오르기로 하였단다. 우리도 이들을 따라 서봉으로 오른다.
허름한 통나무계단을 타고 울창한 숲을 오르다 보면 능선에 오르게 된다. 숲이 울창하여 햇볕을 피할 수는 있지만, 서봉까지 계속되는 된비알은 힘을 빼 놓는다. 어제 저녁 음주와 느지감치 출발한 탓에 점심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 화근인 듯하다. 벌써 오후 한시가 넘었는데 배도 고프고 초반부터 다리는 무겁고 비지땀만 줄줄 흐른다. 계속해서 2시간 넘게 오르는 동안 몇번의 휴식을 취하고서야 서봉에 오를 수 있었다. 능선을 타고 오르다 보면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서면 옥동천을 따라 늘어서 있는 구래와 중석광산인 "상동광업소"터와 함께 독한 중석오염물질을 정화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정화저수지가 내려다 보인다.
능선의 상단으로 길게 암벽이 가로막고 서 있다. 암벽을 따라가면 홈통바위가 나온다. 암벽을 갈라 놓은 듯 생긴 홈통을 빠져나가 능선으로 조금 더 오르면 서봉에 오르게 된다. 서봉은 표지석은 없지만 주능선상의 서쪽 끝으로 능선은 이곳에서 끊기며 급하게 옥동천으로 여맥이 가라 앉는다. 올라오는 중에도 주능선에도 뒤늦게 꽃을 피운 라일락꽃이 자주 보여 운치를 더한다.
서봉에서 장산의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암릉길이다. 암릉을 걷다보면 단애 아래로 깊은 골을 타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옥동천이 현기증이 날 듯 내려다 보인다. 서봉에서 동창산객들의 권유에 막걸리 한잔 얻어 마시고 장산으로 향하니, 조금은 힘이 나는 듯하다. 장산으로 향하는 중간에 망경사로 향하는 길과 백운산장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백운산장길은 비알이 급한 암릉길로 초심자들은 조심을 하여야 한다. 조금 더 오르면 암릉의 끝으로 절음박골로 하산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절음박길로 향하는 암릉의 끝부분에 촛대바위가 있다. 노송과 어우러진 촛대바위에 서면 아스라이 내려 앉은 구릉이 내려다 보인다. 이곳 부터는 부드러운 숲길을 걸어야 한다. 숲길을 걷다가 다시 가파를게 깔닥고개를 오르면 장산의 정상에 오르게 된다. 정상은 오똑하여 7~8평쯤 되는 좁은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올라 설 수는 없으며, 한옆으로 돌로 된 정상표지석이 있고 사방으로 조망을 틔워 놓았다.
장산은 장한 산이라 하여 장산이라 부른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서로는 서봉을 지나 옥동천으로 여맥을 가라 앉힌 산맥이 다시 한 번 순경산, 선바우산을 이르키고, 뒤로 매봉산을 우똑 세워 놓은 뒤에 단풍산으로 이어져 나간다. 북으로는 멀리 두위봉이 보이고 부드러운 능선을 펼쳐놓은 백운산이 늠름하다. 백운산 안부로 최초의 카지노 건물이 보이고 북동으로는 정상의 통신시설이 선명한 함백산이 운무에 감싸인체 서 있다. 동으로 천재단이 아스라이 보이는 태백산이 대간을 타고 구룡산과 선달산으로 이어진다. 장산은 이렇듯 태산, 명산들로 포위를 당한 듯, 둘러 쌓여 있는 산으로 장산에 올라서면 이 모든 산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산으로 실로 장한 산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장산서봉, 순경산, 선바우산, 매봉산>
<두위봉과 백운산>
<동릉 뒤로 보이는 태백산>
<운무에 쌓인 함백산>
정상에서 동창산객들은 동릉을 타고 열녀각을 돌아 어평으로 간다고 한다. 어평은 단종이 사약을 마시고 죽은 뒤에 태백산신이 되고자 태백산으로 향하다 쉬어 간 곳이라고 하여 어평이라 부른다고 한다. 후에 단종은 태백산신이 되고, 지금도 태백산 천재단 아래는 "단종비각"이 있고 해마다 제를 올리고 있다. 구래는 신라 636년(선덕여왕 5년)에 자장율사가 당나라로 건너가 7년간 수행끝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사리를 얻어 귀국한 후,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태백산 갈반지(칡뿌리가 많고 평평한 터)를 찾아 아홉번이나 찾아 왔다고 하여 구래(九來)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차가 망경사에 있으니, 하산은 원점회귀를 하여야 한다. 이곳에는 대중교통 이용이나, 택시를 부르기가 어려워 자차를 이용하는 산객들이 길을 잘 못 내려가면 큰 고생을 하여야 한다. 다시 안부로 내려와 절음박골로 향한다. 부드러운 산판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잡초가 우거져 있다. 땅이 비옥하여 지렁이와 두더지가 많은지, 멧돼지들이 산판을 마구 일궈 놓아 따비밭처럼 만들어 놓았다. 산판에는 군데군데 야생화가 피어 있고 어느 곳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산상의 평지(平地)는 갑자기 된비알로 바뀐다. 이곳은 취나물등 산나물이 지천으로 예전에는 구래사람들이 올라와 산나물을 자루마다 가득히 꺽어서, 메고 내려가기가 힘들어 가파른 비알길을 산나물 자루를 궁굴리며 내려왔다고 한다. 산객들이 잘 찾지 않아 등산로도 희미한데다, 된비알을 직하하기 어려워 지그재그로 내려가야 하니, 산나물 자루를 굴리면서 내려 왔다는 말을 실감할 수가 있다.
가파르게 내려서면 산신각이 나온다. 산신각 옆으로 허름한 산막이 있어 무속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안에서는 괭과리와 북소리에 목탁소리까지 합하여 고요한 산중의 적막을 깨트린다. 산신각을 지나면 골을 타고 돌길을 내려와야 한다. 이길은 돌도 많지만 음습하여 이끼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미끄러우니, 조심을 하여야 한다. 오랫동안 이 곳 산신각을 찾아 왔다는 무속인이 말에 의하면 비가 오면 등산로는 금방 물이 차서 통행이 차단되니, 주의를 하여야 한단다.
조금 더 내려오면 걷기가 불편한 골길을 덮고 있던 울창한 숲이 시야를 틔우며, 임도가 나온다. 임도의 끝은 예전에 돌광산을 하던 폐광터다, 폐광터에 텐트가 하나 있고 몇명의 무속인이 앉아 담소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일단정지를 한다. 아래 골짜기에 신내림을 하여 무속에 입문하는 젊은 여인이 목욕 중이란다. 손수건만 빨아도 손이 시린데, 목욕이라? 하기야 일생의 큰 변화를 맞는 시점이니 추위가 대수이겠냐만,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목욕이 끝날때까지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쉰다. 20여년전부터 부산에서 이 곳 산신각을 찾아 왔다는 나이든 무속인이 미끄럽고 가파른 골길을 오르지 못하여 이곳에다 텐트를 치고 기거하며, 젊은 무속인들만 산신각에 올라 제를 올리게 하고 있다. 폐광터의 한옆에는 작은 습지가 있고 이끼가 수북히 자라고 있다.
폐광산에서 임도를 따라 30분쯤 내려오면 망경사 갈림길에 다다른다. 산행시간은 5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산의 크기에 관계없이 모처럼 버거운 산행이 된 것 같다. 장산은 오지의 장한 산이라는 이름처럼 장쾌하고 웅장한 멋이 있다. 하산을하니, 첩첩산골의 해는 서산에 걸리고, 적막이 감도는 산중에는 산사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망경사의 쇠북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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