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바람과 초원과 등대가 있는 섬, 소매물도에 다녀오다.
여행기간
2008. 10. 4~10. 5(토.일) 흐림
나의 평가
설악엔 단풍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억새를 보러갈까? 단풍을 보러갈까? 컴속을 누비며 적당한 산행지를 물색하고 배낭을 꾸려도 울마늘 호응이 없다. 3일간의 황금연휴에 울릉도나 제주도 쯤은 기대하였을텐데, 산을 좋아하는 산쟁이가 그리 멋들어진 여행을 생각할리가 없다. 그저 어느 산이 좋을까에만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니, 30년 가까이 같이 살면서도 여자 마음을 몰라 준다는 투정을 탓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세상에 눈치코치 보며 이만큼 살아 온 경험으로 급히 방향을 바꿔 "소매물도"를 여행지로 제시하니, 그제야 제대로 감응이 된 것인지 여행준비를 하는 아내의 손길이 바빠진다.
소매물도를 찾아 가는길은 멀기만 하다. 통영에서 배를 타는 방법과 거제도의 저구항에서 타는 방법이 있다. 갈등으로 허비한 시간때문에 점심도 거르고 쉼없이 달려 왔건만 저구에 도착하니 3시가 다 되었다. 부랴부랴 늦은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소매물도로 향하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하늘은 구름이 잔뜩 내려 앉고 희뿌연 개스로 인하여 시계가 좋지 않다. 당연히 카메라에 잡히는 풍경이 마음에 들리가 없다.
저구항을 출발한 여객선은 잠시 매물도를 들린뒤에 다시 소매물도로 향한다. 매물도는 각지고 모가난 것이 메밀을 닮아 "메밀도"로 부르던 것이 지금은 "매물도"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1870년경 김해 김씨가 소매물도에 가면 해산물이 많아 굶어 죽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정착을 시작하였으며, 말의 모양을 닮아 "마미도"라 부르던 것이 변음되어 "매물도"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황금연휴로 인하여 단체로 온 여행객들도 많지만 유독 젊은 연인들이 많은 것 같다. CF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소매물도 등대섬은 "송혜교"와 "차태연"이 주연한 "파랑주의보"를 통하여 젊은 연인들의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연인들이 소매물도에 들어가면 배가 끊긴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매물도의 풍경은 한폭의 풍경화 같다. 섬의 안부에 접안시설과 등대가 있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늘어서 있다. 관광객을 인식하여서인지 지붕의 색깔도 특색있게 칠을 하여 놓았다. 섬 주민들은 산비알에 작은 농토를 일구고 고기를 잡으며 살아 가고 있다. 뱃전으로 밀려드는 시원한 해풍을 맏으며, 서쪽으로 기울어진 양광을 받아 반짝이며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과 군데군데 보이는 바위섬과 고기잡이 배의 모습을 보노라니, 바다가 없는 내륙에서 태어나, 오로지 산을 벗삼아 살아 온 나로서는 이국의 풍경을 보는 듯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젊은 연인들의 여행지 답게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여 뱃머리 한쪽에서 커플링을 나누어 끼고 핸폰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연인들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다지만 아름답고도 설레임을 주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옆자리의 아내에게 은근히 미안함이 생겨나는 것이 다정다감이란 찾아 보기 힘들고 오로지 일과 술과 산으로 점철된 나날로 30년 가까운 세월을 때워 넘기고도 당연한 듯 무감각하게 살아 온 것 같아서이다.
저구를 출발한지 30분 정도의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자 유람선이 짧게 뱃고동을 울리며 소매물도에 접안한다. 소매물도를 떠나는 마지막 배를 타려면 부지런히 등대섬까지 다녀와야 한다. 마지막 뱃시간은 한시간 남짓 남았으나 소매물도 제대로 돌아 보려면 2시간 안팎을 소요하여야 하며, 등대섬까지만 다녀온다 하여도 1시간 30분 정도는 잡아야 한다. 늦게 도착한 관광객들은 마지막 배를 타기 위하여 부지런히 섬의 산상으로 오른다. 소매물도의 정상인 망태봉이 해발 157.2m로 그리 높지 않으나 가파르다. 작고 허름한 섬집 사이로 구불구불 가파르게 오르면 섬의 산상으로 옛 매물도초교 소매물도분교였던 폐분교가 나온다. 지금은 "스쿨하우스"라 이름으로 관광객들의 머뭄처로 이용되고 있으나 예전에는 몇 안되는 어린 학생들의 배움터 였을 것이다.
폐분교를 지나면 동백림이 늘어선 등산로를 따라 등대섬으로 향하게 된다. 중간에 망태봉으로 오르는 길이 있으나 갈길이 바쁘니 그냥 지나친다. 소매물도의 산상을 내려서면 등대섬으로 이어지는 암벽에 다다른다. 모두들 편한길을 택하지만 산을 즐겨 찾던 본능이 발산되었는지 암벽의 끝을 타고 진행한다. 그러나 암벽의 끝에서 하강을 하기는 매우 힘들다. 암릉산행에 익숙한 울마눌도 포기를 하고 되돌아 간다. 홀로 암벽을 타고 내리는데 그리 힘든 구간은 아니지만 돌이 물러서 발디딤도 손잡이도 불안하다. 골을 타고 내리면 철계단이 놓여 있으니 가능한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소매물도에는 애틋한 전설이 있다. 180년 전에 매물도에 처음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허(許)씨 부부가 있었다. 이들은 돗단배로 이곳을 항해하다 풍랑으로 매물도에 표류하게 되고 매물도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몇년이 지난뒤 허씨 부인에게 태기가 있고 쌍둥이 남매를 낳게 되었다. 쌍둥이 중 한명은 명이 짧다는 속설을 믿고 근심끝에 동생인 딸을 소매물도에 내다 버렸다. 남은 아들이 청년이 되었고 절대로 소매물도에 가서는 아니 된다는 부모의 말슴에도 불구하고, 하루는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다가 소매물도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헤엄을 쳐서 소매물도로 건너 간다.
소매물도로 건너간 아들은 그곳에서 아리따운 또래의 처녀를 만난다. 오누이 인 줄 알길 없는 남녀는 곧 사랑에 빠지고 매물도로 돌아 가는 것 조차 잊어 버리고 깊은 관게를 갖게 되었다. 그 순간 벼락이 떨어져 두 남매는 바위로 변해 버렸다 한다. 이렇듯 이루지 못 할 사랑의 전설이 깃든 소매물도에 요즘들어 사랑을 이어주길 원하는 젊은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소매물도의 암벽을 내려서면 몽돌길에 다다른다. 길이가 70m쯤 되는 몽돌길은 물이 차면 건널 수 없고 물이 빠지면 길이 되어 걸어서 건널 수 있다. "모세의 기적"처럼 하루에 두번 물길을 열어주는 몽돌길은 주위로 조개와 성게가 많은지 학생인 듯 한 젊은 청년이 물속에 들어가 성게를 따고 여학생들은 바구니에 주어 넣는다. 10월의 바닷물이 차기는 하겠지만 예쁜 여학생들이 진을 치고 성게가 올라 올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추위가 대수이겠는가?
몽돌길을 지나 등대섬으로 오르는 길은 일부의 소나무 군락을 빼고는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원에는 가을에 피어나는 들국화가 화사하게 피어 있어 계절을 말하고 있다. 목조계단을 따라 등대로 올라서면 시원하게 소매물도가 조망된다. 아래 글썽이굴에는 진시황의 명령으로 불노초를 구하러 온 중국사신 일행이 비바람을 피해 이곳에 머물며 서시과차(徐市過此)라는 글을 바위에 남겼다고 전하나 이를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쪽빛 바다와 동백숲과 초원과 암봉이 어우러진 소매물도는 족히 선경(仙景)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곳이다.그러나 이곳의 삶은 그리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하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일상의 찌들음을 털어 버리는 여행에는 꼭 좋은 풍치도 아름다운 인심도 아닌 것 같다. 다만 일상을 떠나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가 느끼지 못한 새로운 것을 느끼고 누적된 일상의 권태로움을 덜어 주고 새로움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와 확대만으로도 좋을 듯하다.
등대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암봉의 수려함과 맞은편으로 보이는 소매물도의 풍경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지체하며 풍광을 즐길 시간이 없다. 마지막 배를 타고 거제에서 잠을 자고 거제의 명산중에 한곳인 망산이나 통영의 미륵산 정도는 올라 보겠다는 계획이 마음을 급하게 한다. 급히 등대섬을 떠나 소매물도의 섬상(島上)인 망태봉으로 오른다.
오락가락 겨우 망태봉 정상에 오르니 폐허의 등대가 하나 서있다. 등대를 내려서 폐교앞에 다다르니 이미 마지막 배는 짧게 고동을 울리며 소매물도를 떠나간다. 난감하기는 하나 산행을 일삼아 온 경력과 연륜으로 걱정을 떨구고 하루밤를 소매물도에서 머물기로 작정한다. 3일의 황금연휴로 분명히 팬션도 민박도 없겠지만 아무리 작은 섬이라지만 이 한몸 뉘일 자리가 없겠는가?
마누라를 포구에 않혀 놓고 마을을 뒤지니 폐가를 수리하여 욕실도 화장실도 없는 방이 하나 있다. 곰팡이 냄새도 조금나나 깨끗하게 도배를 하고 장판을 깔아 놓아 노숙보다 낳을 것 같아 자리를 잡았다. 그나마 황금연휴에 방을 얻은 것을 스스로 대견스러워 하며 접안시설에 나갔다. 멍개와 손가락 만큼한 덜자란 해삼과 생굴을 합하여 손바닥만한 접시에 내어 놓는다. 몇첨 되지는 않지만 여행지에서의 별미로 생각하고 마누라의 따가운 눈초리를 애써 외면하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2차는 마누라 밥 먹인다는 핑계로 소매물도에서 유일한 식당인 윗팬션에 앉아 마누라 회덮밥 한그릇 시켜주고 나는 소주 한 병 추가하여 낫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20년 전에 섬에 들어와 어부와 민박을 치루며 살아 오다 지금은 번듯한 윗팬션의 사장님이 되신분의 얼큰한 취기와 함께 새롭게 팬션에 투자하며 이곳에 들어와 이장을 맡고 계신 아랫팬션 사장님의 이야기도 젊은 시절 섬으로 시집와 물질을 하며 반평생을 보낸 초로의 아낙네의 이야기도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드라마나 영화 못지 않은 한편의 드라마로 다가온다. 여행에 취한 것인지 술에 취한 것인지 구분하기도 어렵게 밤이 으슥해서야 낫설고 작은 방에서 잠이 들었다.
술을 마셔도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는 습관탓인지 새벽의 여명을 느끼며 잠을 털고 일어나, 길게 소매물도의 서북쪽 해안선을 따라 산책을 한다. 갯바위 낚시로 유명한 소매물도는 해안선을 타고 늘어서 있는 갯바위 마다 밤을 새운 낚시꾼들이 밝아오는 새벽의 여명을 의식하지 않고 낚시에 열중하고 있다.
이른 아침 산책로에서 만나는 야생화 군락지는 인상적이다. 야생화 군락지를 지나면 거대한 바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위를 지나면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어 어둠침침한 동백나무 숲길을 지나게 된다. 섬의 북쪽에 다다르면 암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은 차츰 산책로가 희미해 진다. 이곳에서 원점회귀를 한다.
해안의 갯바위에는 따개비와 작은 조개들이 덕지덕지 달라 붙어 있다. 갯바위에 앉아 담배를 빼어물고 잠시 쉬노라니, 살랑살랑 불어 오는 바닷바람이 온유한 여인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살갓을 두둘기어 상쾌하기 그지 없다.
접안시설에는 부지런한 섬 아낙들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손길로 분주하고 밤을 새운 낚시배에서는 얼마 안되는 물고기를 다듬고 있다. 민박집으로 돌아오니 초로의 아낙이 빨래를 하고 있다. 물이 귀한 소매물도에서는 주로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으나 갈수기에는 염분이 많아 집수시설을 하여 놓고 비가 오면 이를 저장하였다가 식수로 쓰곤 한단다. 매점에서 식수를 구할 수가 있지만 소매물도에 가시는 분들은 식수를 충분히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자식들은 모두 육지로 떠나고 병약한 남편은 병원이 가까운 통영에서 홀로 지내고 섬에는 아주머니 홀로 남아 주중에는 물질을 하여 미역이나 조개를 잡고 관광객이 몰리는 주말에는 접안시설에 나가 해산물을 판다는 아주머니는 갯바람을 쐬며 물질을 하면서 살아 온 탓인지 나이보다 훨씬 연륜이 들어 보인다. 힘이 들어서 이제는 그만두고 쉽지만 바다를 떠나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래도 소매물도에 관광객들이 붐비며 섬 아낙의 수입으로는 꽤 짭짤하여 그만두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초로의 섬 아낙과의 대화속에서는 소매물도의 평화로운 풍경과는 달리 삶에 지친 모습이 들여다 보인다. 세상에 파라다이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아쉬움을 안고 첫배를 타고 소매물도를 떠나온다. 이왕 온김에 해금강을 구경하고자 해금강으로 찾아가 해금강 맞은편 언덕에 올라 자리를 잡고 밥을 지어 먹고 잠시 쉴 요량으로 바닷바람이 시원한 언덕에 자리잡고 누웠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잠을 불러 올쯤에 잔뜩 내려 앉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니, 해금강을 포기하고 집으로 향한다.
윗 사진은 해금강 입구에 자리한 신선대전망대에서 바라본 신선대의 풍경이다.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길옆으로 화사하게 만개한 코스모스가 바닷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모습이 가을이 무르익어 감을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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