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 진나라시대에, 어느 마을에 수(手)씨 집안이 있었다. 그 집안은 대대로 손재주가 뛰어난 집안이었다. 이 '수'씨 집안에는 매우 뛰어난 말 한 필이 있었는데, 이 말은 솜씨 좋은 수씨 집안의 손재주와 정성에 의하여 길들여진 것이었다. 어느 날 도적들과의 전쟁에서 수씨집안의 큰아들이 이 말을 타고나가 도적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워 진시황으로부터 벼슬을 한자리 얻게 되었다.
이것을 본 앞집의 족(足)씨 집안에서는 "손재주나 우리집안의 달리기를 잘하는 발재주나 비슷하니 우리도 말을 한 필 길러서 공을 세워봄이 어떨까?" 하여 말 한필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그 후, 도적들이 보복을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 이에 족씨는 큰아들에게 "어서 빨리 수씨 집안보다 먼저 말을 타고 나가 공을 세우거라" 하였고, 족씨 집안의 장자는 너무 급히 말을 타고 나가다 대문의 문설주에 머리를 부딪쳐 어이없게도 죽고 말았다. 이를 본 족씨는 통곡하며 "내가 진작 분수에 맞는 행동을 했더라면 오늘의 이 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하며 큰 아들의 주검을 부여잡고 통곡하였다 한다.
이 때부터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남의 일에 참견하거나 분수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足家之馬(족가지마)”라고 하며, 족씨 가문이 집안사람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다. 는 뜻으로 “족가고인내(足家苦人內)”라고 말하고는 했다고 한다.
나라 안팎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텔레반의 우리 선교사 납치사건”을 지켜보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독선과 오만의 산물이라며 싸잡아 비난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전투병을 파견하여 무력행사를 하자는 등.... 갖가지 현실성이 결여된 해결책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오직 답답하고 속이 터지면 그런 비난과 의견이 나오겠는가? 마는 신중한 대처와 함께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땅의 기독교는 짧은 역사를 비웃듯이 엄청난 양적 팽창을 하여 왔다. 양적팽창에 따른 그들의 사회적 영양력도 커지고 목소리도 커졌지만 한편으로는 아집과 독선으로 자가당착에 빠져 여론의 질타에 휘둘리기도 하고, 비기독교인들에게 이질감과 함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교단의 안팎에서도 양적팽창을 자제하고 질적인 향상을 꾀하여야 한다는 자성론과 비판도 만만치 않으나, 현실은 아직도 그러하지 못한 듯하다. 이번일이 아니더라도 개신교에 대한 일부 부정적인 반응으로 질타를 퍼붓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개신교에 대한 배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독선과 아집으로 변질되어 가는 일부 종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편협함으로 종교가 추구하고자 하는 그 본질의 훼손을 우려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질보다 양을 우선하여 정리하지 못하고 팽창에만 목을 매다가는 폭발의 더 큰 부작용을 나을 수 있으니, 다시 한번 골고다 고원에서 "예수"의 시련이 재현되든지, "마틴루터"의 개혁의 깃발이 푹풍처럼 이땅을 휩쓸어야만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인지? 이제 무차별 교세확충에 혈안되어 붉게 충혈된 눈에 핏기를 빼고, 인류에게 종교가 필요한 그 참뜻을 헤아리고 실천을 하여야 할때가 아닌가 싶으니, 그것을 해줄 사람은 "예수"도 "마틴루터"도 아닌 이땅의 종교지도자나 목회자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인류애에 입각한 순수한 봉사활동이라고~
그러나 선교와 봉사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선교는 상대방을 나의 사상속으로 끌어 당김이요, 봉사는 나의 것을 상대에게 댓가 없이 나누어 주는 것이니, 어찌보면 내것으로 만드느냐, 내것을 주느냐 하는 서로 상반되는 관계에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내것을 만들기 위하여 내것을 나누어 주는 선교를 위하여 봉사를 하는 기브 미 테이크가 기독교의 전통적인 선교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태는 봉사가 우선이 아니라 선교를 통한 교세불리기의 욕망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독선과 오만에서 비롯된 모험적 행동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또는 남을 부정하여 스스로 나를 부정속에 빠트리는 자충수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그렇다면 하느님을 빌어 하느님을 섬기는 목자로서 그 옛날 바벨탑을 쌓으려 하던 자들의 그 오만하고 무모한 행동과 어떠한 차이가 있다는 것인가?
무엇이? 왜?
꽃다운 젊은이들을 사지로 떠밀어 생명을 잃고 고통스럽게 하며, 가정과 국가와 심지어는 국제사회까지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지? 설사 그 목적의 순수함을 인정하여 "순교자"의 고결한 희생이라 치드라도, 지도자가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파장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보기가 어려우니, 독선과 오만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것은 또 다른 나의 독선에서 비롯된 느낌인지?
오늘 하루도 그들의 무사귀환을 초조하게 기다리나, 연일 애끓는 소식뿐, 안타까움과 함께 울화가 솟구치니 이거야 말로 “족가지마(足家之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제 : 정부, 직접 협상 준비중인 듯 [미디어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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