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여행/충 청 권

중원의 역사를 찾아가다.

바위산(遊山) 2007. 6. 17. 03:30
여행지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중원의 옛터를 찾아서~
여행기간
2007년 6월 16일 (토)
나의 평가
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
구름한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작열하는 태양의 횡포에 속수무책이다. 6월의 중순치고는 너무도 햇살이 강열하여 나들이를 망설이게 하는 날이다. 오전에는 볼일때문에 산행을 못하고, 오후가 되니 시간이 조금난다. 먼곳을 찾아가기는 힘들겠고, 가까이 있으나 자주 찾아보지 못하고 평소에 무심코 지나치던, 중원탑과 고구려비 등이 있는 충주의 중원문화유적을 찾아 나선다. 충주댐 아래로, 목계나루를 위로 하여 조성되어 있는, 조정지댐을 찾아가면 중원문화유적지가 나온다. 아래가 탄금호이며(조정지댐) 앞으로 보이는 산이 장미산성이 있는 장미산이다.
가금면사무소 앞에 있는 공원에는 간단한 체육시설과 함께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작은 선착장이 있으며, 겨울철새를 관찰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망원경을 설치해 놓아서 철새를 비롯한 주변의 경치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망대에 올라서 호기심에 망원경을 들여다 보니, 여름철이라 철새들은 모두 북쪽으로 돌아가고, 철새를 대신하여 골프장의 골퍼들이 철새를 대신하고 있다. 호반의 앞쪽이 탄금호로 둘러 쌓인 임페리얼CC다.
이곳에서 충주쪽으로 조금 남진을 하면 충주박물관과 중원탑이 있는 호수공원에 도착한다. 호반을 끼고 잘 조성된 공원은 가족이나 연인들의 나들이 장소로 아주 좋을 듯하다.

호반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잔잔한 파도가 푸른물결을 만들어 놓으니, 작열하는 태양열도 호반과 바람에 융화를 하는지? 조금은 기세를 꺽는 듯하니, 꽤나 많은 사람들이 소풍을 즐기고 있다.

이곳에 중원탑평리7층석탑이 있다. 현존하는 신라시대의 탑으로는 가장 높은 탑으로, 신라 원성왕때 세워졌다는 전설이 있으나 그 연대는 확실하지 않고, 고려때의 유물이 나온것으로 보아서 시대를 거치며 몇차례 보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17년 보수때에 6층 옥신과 기단에서 사리함과 청동제 유개함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에 위치한다하여 중앙탑이라 부른다 한다.
호수공원을 떠나 조금 더 남진을 하면 탄금대가 나온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강이 만나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합수지점으로 충주북쪽 3km 지점에 있으며, 해발 100m의 나즈막한 동산으로 대문산 또는 견문산이라고도 부른다 한다.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가야금과 함께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는 곳이며, 조선조 임진왜란때 팔도순변사 신립장군이 이곳에다 배수진을 치고 저항하다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탄금대는 그 높이는 높지 않으나, 북쪽을 남한강으로 감싸고 있어서 퇴각로가 없다. 왜군이 조령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립장군이 이곳에서 배수진을 치고 끝까지 싸우다 목숨을 바치니, 이곳에 선열들의 혼을 달래기 위한 충혼탑을 세워 놓았다.
충혼탑 옆으로는, 일제때에 충주가 배출한 아동문학가 권태웅 시인의 감자꽃 시비가 서있다. "자주꽃 핀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꽃 핀건 하얀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감자/ 라는 짧은시로 한국인은 한국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항일정신을 내포한 시를 쓰고, 옥고를 치르다 병이 나서 40대에 생을 마친 애국시인이다.

조금 내려가면 열두대 위로 탄금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올리지 못하고, 탄금정 옆으로는 "신립장군순국지기"가 홀로 쓸쓸히 서 있다.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타고 제자를 가르치며, 원래의 조국과 점령국의 사이에서 오르지 예술에만 몰두하였으나, 그 회안은 매우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열두대로 내려서면 남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신립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조총으로 무장한 십수만의 왜병을 훈련도 받지 못하고 무기도 변변치 못한 팔천 군사로 막으려면,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어서 남한강으로 퇴로가 막힌 이곳에다 배수진을 치고 병사들과 끝까지 싸우다, 포로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열두대에서 남한강에 몸을 던져 47세로 순절한 곳이다. 열두대란? 가야금의 줄이 열두개라 하여 열두대라 했다는 전설과 신립장군이 왜병과 악전고투를 하며 열이 받은 활시위를 강물에 식히려 열두번을 올라 내렸다는 전설도 있는 곳이다. 근래에 만든 이곳의 계단도 열두대의 의미를 살리는 뜻으로 열두계단으로 만들어 놓았다.
탄금대를 돌아보다 보면, 그 옛날 처절했던 투쟁의 함성이 들리는 듯한데, 남한강은 너무도 평온하고 아름답게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어, 다시는 이 아름다운 강물을 핏물로 물들이는 치욕의 역사를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는 과거이나, 현재도 언젠가는 역사로 남을 것이며, 다가올 미래 또한 역사의 장으로 남을 것이니,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고, 더 좋은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지금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키우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아래가 신립장군의 충정을 기리는 추모비이며 아래로는 대흥사라는 절이 있다. 원래는 신라때에 지어진 고찰이었으나 몇차례 소실되고 근시대에 재건하여 지금도 중창을 계속하고 있다.
탄금대를 돌아오면 호반으로 내려가 암벽에 음각을 하여 놓은 마애불을 만날 수가 있다. 그리 크지는 않으나 이곳에서 바라보는 탄금대의 작은 단애와 탄금호의 모습은 절경으로 다가온다.
다시 오던길을 되돌아 오다보면 중원창동 5층석탑을 볼 수가 있고, 그옆에는 미륵불이 서있다. 석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는 칭동리 인근 절터에 있던 것을 1978년에 이곳에다 복원했다고 하며, 미륵불은 광산에서 발견되어 그 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고시대의 것으로 보여 이곳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5층석탑을 지나오면 누암리 고분군을 볼 수가 있다. 충주시 가금면 누암리 산 일대에 널려 있는 누암리고분군은 사적 463호로 230여기 가운데 26기를 발굴하였으며, 발굴된 고분에서, 후기신라 양식의 토기류와 철기류, 청동제띠장식, 금동제 귀고리 등의 장신구가 다량 발굴 되었다고 한다.
다시 중원탑을 지나 가금면 용전리 삼거리에 다달으면 중원고구려비를 만나게 된다. 석주형의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비로 광개토왕비와 모양이 흡사하며 고구려의 전성기인 5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비문은 희미하여 모두 해석하지는 못하였지만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 전성기때에 신라의 땅을 빼앗고 세운 남한 유일의 고구려비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고구려비가 서있는 곳에서 1시간 남짓하게, 장미산을 오르면 장미산성이 있다. 장미산은 가금면 장천리 탄금호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수목이 울창한 작은 산이나, 정상에 오르면 남으로 조망이 아주 좋아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한 듯하다. 고구려비가 있는 용전리에서 올라도 되지만 장천리에서 오를수도 있다. 수목이 우거진 완만한 임도를 따라 한시간쯤 걸어서 올라도 되고 소형차를 끌고 장미산성까지 직접 오를수도 있다. 정상을 못미쳐 작은 사찰이 보이고 장미산성은 많이 훼손되어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원래는 백제가 처음 쌓은 것을 고구려가 점령하여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장미산의 정상은 수목이 우거져 북동쪽은 조망이 좋지 않고, 정상에는 커다란 묘지와 산불감시초소가 있으며 산객들이 쉴 수 있도록 나무 그늘 아래로 나무의자도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의 남서쪽의 조망은 아주 좋다. 아레로 탄금호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이 근처에 수룡폭포 아래로 수려한 봉황계곡이 있어 여름철 물놀이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하나, 날이 저물어 들리지 못하였다.
이곳은 멀리 충주시와 함께 뒤로 오똑한 월악의 영봉과 함께, 조령산을 비롯한 월악군의 수려한 산들이 마루금을 이루어 놓았다. 이 작은 산에서 이렇듯, 시원하게 조망이 트이니, 삼국의 쟁탈전으로 몸살을 앓은 이 지역에서 장미산의 전략적 가치는 중요했으리라 생각된다. 중원의 역사가 살아 있는 충주는 남한강과 달천강이 합류하여 풍부한 수자원과 함께 넓고 비옥한 분지로 이루어져 있어서 농경시대에 식량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으로 삼국이 서로 이곳을 빼앗기 위하여 분쟁이 그치지 않은 곳으로, 통일신라때에도 그 중요성을 들어 청주를 서원경으로, 충주를 중원경으로 하여 준수도의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장미산은 보련산과 더불어 장미와 보련의 전설이 있다. 옛날 노은에 장미라는 아들과 보련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남매는 둘 다 장수의 기질을 타고 났다고 한다. 한집에 두명의 장수가 태어나면 한명이 희생을 하여야 한다는 속설에 의하여 장미는 장미산에 성을 쌓고, 보련은 보련산에 성을 쌓아서, 지는 사람이 희생을 당하기로 하였는데, 아무래도 누이인 보련이 먼저 쌓을 것 같자, 어머니는 아들 장미를 도우려고 떡을 해서 보련에게 먹인다. 보련이 배가고파 떡을 먹고 마지막 돌을 들고 오르는 중에 장미가 먼저 성을 쌓았다고 하며, 보련은 어머니가 그런 것을 알고 어데론가 홀연히 떠나고, 그날밤 보련의 본집에는 커다란 별똥별이 떨어졌다는 슬픈 전설이 있으니, 초정약수가 있는 초정의 구녀산 구녀성의 전설과도 비슷하다. 오래도록 이어온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낮의 작열하던 태양이 열기를 식히고, 서쪽으로 오뚝 솟은 보련산에 걸리니 석양이 붉게 물든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 주말오후의 중원문화탐방은, 다시한번 역사를 되새겨보는 좋은 여행으로 서산에 지는 붉은 해와 함께 마무리 하고 하산을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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