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여행/영 남 권

한산대첩을 재현하는 통영의 <이순신공원>

바위산(遊山) 2016. 8. 21. 22:40


통영시 정량동에 있는 망일봉 기슭 바닷가에 이순신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순신 공원은 통영지역의 이충무공 유적지와 한산대첩에 대한 역사교육을 위해 학습 및 다양한 문화체험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순신 공원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중앙에 한산도와 거북등대, 한산대첩비가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미륵산이 있다.

 




미륵산을 둘러보고 장사도를 가기위해서 통영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모텔을 잡아 놓고 가까이 있는 이순신공원에 드렀다. 오는날이 장날이라고 한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의 마지막 날로 이 곳 앞바다에서 한산대첩을 재현하고 있다. 헬기릐 수난구조 시범과 소방선의 퍼레이드, 거북선과 어선을 동원한 한산대첩 재현, 불꽃놀이 등이 이어진다. 그러나 배도 고프고, 술도 고파 대충 둘러보고 하산을 한다. 



목동 김천손은 미륵산에서 일본 수군의 동향을 보고 이를 신속히 조선 수군에 알려주어 조선 수군이 작전을 수립하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조선 선조 25년 7월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다음 날인 6일에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어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에게서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견내량파왜병장 보면 한산도해전 당시 일본 수군은 전선 73척 : 아다케부네 36척 세키부네 24척 고바야부네 13척인데. 아다케부네는 전투원 60명 노꾼 80명 대포 3 철포 30 세키부네는 전투원 30 노꾼 40 대포 1 철포 20 고바야부네는 전투원 10 노꾼 20 대포 0 철포 8 이다. 그러니까 일본수군은 7110명 선을 넘을수없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 길이 약 4km에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데다,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운신하고 전투를 벌이기에 좁은 해협이었 다. 반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6척 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대여섯 척의 조선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전 조선 함대가 배를 돌려 학익진을 펼쳤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이 층각대선 한 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왜선 47척을 불사르고 부수었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일본의 전선들은 판옥선에 비해 급격한 회전이 어려웠고(따라서 후방은 비워져 있었지만,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함대의 정면에 배치된 함선은 많은 피해가 우려되었지만, 조선 함대는 압도적인 화포의 화력으로 이 불리한 점을 극복하였다. 격침되거나 나포된 일본 함선은 모두 총 59척이었고, 병력 4~5000명(고려선전기 등을 토대로 마치 한산해전에 1500명이 참전했다는 식으로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떤 일본 사료에도 그러한 말은 없다.

아다케급 함선부터가 7척 참여했는데 1500명이 참전했다는 것은 너무나 큰 무리수이다.) 중 상당수가 전사했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견내량파왜병장》에는 400명, 《와키자카기》에는 200여 명)은 군량이 없어 13일간 해초를 먹으며 무인도에서 떠돌다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마나베 사마노조는 이때 자신의 배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하였다.

이 전투는 행주대첩과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3대 대첩의 하나로 불리며,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로 승서되었다. 이 해전을 진주성대첩·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부른다. 한산도 대첩은 일본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다.

나아가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불리했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구한말 고종 황제의 미국인 고문 헐버트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 라고 감탄하였다. 한산도 해전 다음 날 벌어진 안골포서 벌어진 해전도 이순신은 승리로 이끌었고, 이순신은 정헌대부, 이억기 · 원균은 가의대부의 관계를 받았다

38304












노인전문정신과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