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의 바닷가를 둘러보고 찾아간 곳은 덕숭산 수덕사다. 한 번쯤은 올라가 보아야지 하면서도 시덥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던 산이 덕숭산이다. 마주하고 있는 용봉산에 몇번 올라 본 것에 비하면 산쟁이로서 나름 푸대접한 것처럼 느껴져 슬며시 미안함마져 생겨나는 산이기도 하다. 덕숭산은 북으로는 가야산,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서 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여러 백제 사찰중에서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 뿐이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덕사 집단시설지구는 그 규모도 크고 매우 번잡하다. 그만큼 이절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는 것일게다. 주차를 하고 길게 집단시설지구를 지나면 울창한 숲길로 접어들게 된다. 걷기 좋고, 풍광 좋은 녹음길 위로 빗방울이 추적추적 떨어진다. 녹음길 중간에 커다란 "덕숭산수덕사" 간판이 매달린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을 지나 녹음길을 좀 더 걸으면 또 다시 원래의 일주문을 다시 통과하여야 한다. 이곳은 사천왕문도 두개로 되어 있어 절의 규모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수덕사에는 오래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수덕사7층석탑>
<수덕사3층석탑>
수덕사는 많은 문화재와 규모를 자랑하는 사찰로 제대로 둘러보려면 사찰뒤 덕숭산 등산로에 산재된 암자와 석불 등을 둘러 보아야 하지만 오늘은 여의치가 않다. 사찰 아래로 구 일주문 옆으로 고암 이응로 화백이 기거하였던 곳이기도 한 수덕여관과 새로 지은 미술박물관이 있다. 고암은 1923년 서울로 올라와 당시 유명한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사군자·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묵죽을 출품하여 입선했고, 1935년 일본으로 가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에게 사사했으며, 혼고 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 기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1946년 배렴·장우성·김영기·조중현 등과 함께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했으며, 1948년 홍익대학교 주임교수로 있었다. 특히 1962년 파리 파케티 화랑에서 평론가 자크 라세뉴의 주선으로 콜라주전을 열었으며, 1965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주목받았다. 이해부터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개설하여 묵화·서예 등을 가르쳐 3,000여 명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1967년에는 6·25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 주선으로 석방,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일로 인해 국내화단과 단절되었으나 스위스와 프랑스에 이어 일본·미국·벨기에를 중심으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전개했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 문헌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해 백건우·윤정희 부부납치음모라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와는 완전 단절되었다. 이후 1985년 도쿄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1989년 호암 갤러리에서 초대전이 열리던 중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신여성이라 칭하던 나혜석이 수덕사의 비구니를 청하며 수덕여관에 칩거하던 무렵, 후배인 이응노 화백이 나혜석을 찾아 종종 담소를 나누곤 했었다고 한다. 이응노는 나혜석이 떠난 후 1944년 수덕여관을 매입한다. 중매로 결혼한 아내와 동생에게 운영을 맡기고,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던 당시 고암에게 해줬던 꿈같은 프랑스 생활과 자유.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을 실천이라도 하듯 자신이 가르쳤던 21살 어린 이화여대생 제자와 사랑에 빠져 함께 프랑스로 떠난다.
그의 본처는 2001년 눈감는 순간까지 수덕여관을 운영하며 청상으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일생을 살았다고 한다. 도중에 고암은 프랑스에서 불려와 '동백림 사건'으로 투옥되고 그 옥바라지까지 맡아 해줬다고 하니 당시그의 조강지처야 말로 부처가 아닌가 싶다. 그 고마움 때문인지, 몸을 추스리기 위해서 였는지 고암은 석방 후 잠시 수덕여관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수덕여관 마당가에 있는 바위에다 조각작품을 하나 남겨 놓았다고 한다.
수덕사를 떠나 찾아간 곳은 추사기념관이다. 추사 김정희는 정조10년(1786)에 태어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한국금석학의 개조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고 한다.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나, 당파에 치중하다 몇번의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추사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김정희는 많은 사람과 알고 지냈으며, 중인계층과 양반 사대부 계층 등을 이끄는 거대한 학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며, 대원군의 정책도 북학에 기초한 실학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학문에서는 고증학에 뜻을 두어 중국의 학자들과 문연을 맺어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등 고증적인 공로도 크다.
서예·도서·시문·물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묵화에서는 난초·대나무·산수화 등도 잘 그렸다. 한편 그에게 금석학을 배운 유명한 인물로는 오경석이 있고, 난초를 배운 이는 이하응이 있다. 그리고 지인에게 난초를 그려 줄 때 별호를 다르게 할 때가 잦아 한국의 위인 가운데 가장 많은 별호를 가지고 있다. 추사는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별호로서 서호(書號)이다.
그러나 다방면에 걸친 업적에 만큼 그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 역시도 유교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18 세기에 싹튼 풍속화와 진경 산수화를 낮게 평가했다. 말년에 과천에서 은거할때는 불교에 빠지기도 하였다. 추사 연구의 디딤돌을 마련한 사람은 일제시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역사학자 후지츠카 지카시다. 그는 최초의 전문적인 추사연구가라 할 수 있다. 보기 드문 "추사매니아"이기도 하다. 추사의 인격과 학문에 매료되었던 후지츠카는 한 · 중 · 일 국경을 넘나들며 추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문집 등 기초자료의 부실을 보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추사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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