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제 : 2014년 2월 27일(목) 흐리고 바람 많음
누구와 : 연.정과장
어데에 : 중국 위해의 적산법화원과 장보고유적지
중국여행 마지막날 찾아간 곳은 위해의 ;석도적산풍경구'의 법화원이다. 위해 룽청시 남쪽 해안에 자리한 적산법화원은 1천2백년전(서기823년) 해상왕 장보고가 당나라에 머물던 시절에 세운 불교 사찰로 장보고 유적지와 해신인 적산명신상이 있는 곳이다.
온유하던 날씨가 갑자기 심술을 부린다. 바람도 많이 불고 약간의 빗방울을 머금은 흐릿한 날씨다. 춥다. 더구나 법화원을 오르는 10인승 미니차량은 창문도 없이 커텐만 드리우고 달린다. 그러나 거의 거적대기 수준으로 파고드는 찬바람을 다 막지는 못한다.
법화원은 중국 북방에서는 제일 큰 사찰로 이 법화원에서는 관음전 극락보살계로 청동으로 주조된 적수관음은 높이가 25,8m ,무게은 200t 으로 주위에는 18나한이 세워져 있으며 아름다운 성가음악이 흘러 나오고 음악에 맞추어 분수쇼가 열리고 있다. 그 모습은 법화원의 최고의 볼거리를 만들어 놓는다. 크고 작은 분수와 함께 18나한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는 모습과 용머리에서 불을 뿜어내는 불쇼까지 합하여 하이라이트를 만들어 놓는다.
<법화원전경>
법화원은 장보고가 신라방에 세운 신라원으로서 해외포교 활동과 본국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도당승들이 많은 혜택을 입었으며 법청·양현·성림 등 30여 명의 승려들이 이곳에 상주하기도 했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연중행사로는, 신라의 예를 따라 8월 15일을 전후해 3일간 축제가 있고 정기적인 강경회를 마련하는 등 활발한 불교행사가 행해졌다.
<법화원에서 바라본 해신 적산명신상>
<적산>
법화원의 의식은 신라식 법회의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서 강경의식·일일강의식·송경의식 등이 있었다. 매년 2차례 2개월에 걸친 강경의식에서 여름에는〈금광명경〉이, 겨울에는 〈법화경〉이 강경되었다. 강경의식의 진행은 진시에 강경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법당에 대중들이 모이고, 이어서 강사가 등단하여 5분향례를 합송한 뒤 강경할 제목을 부처님 앞에 올리고 그 제목에 따라 문답형식으로 경전을 강설했다.
적산은 해변가에 위치한 아름다운 바위산이다. 그 모습이 수려하여 우리나라의 산쟁이들도 많이 찾는 산이다. 법화원과 장보고기념관을 둘러 보는 재미도 좋지만 자꾸만 바위산으로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없는 산을 좋아하는 산쟁이의 마음 쏠림에 있는 것 같다.
<법화원 청동여래좌불상>
<분수쇼 장면>
<법화원내불상>
분수쇼를 보고 법화원을 한바퀴 둘러본뒤 해신상으로 차를타고 오른다. 거대한 해시상인 적산명신상은 바다에 나가는 사람들이 풍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기도를 올리던 곳이다. 산에 가면 산신이 절대신이듯 바다에서는 해신이 절대신의 역할을 한다. 해신상의 규모는 첫는에 압도를 당할만큼 웅장하다. 해신상 내부를 둘러보고 장보고전기관으로 향한다.
<해신 적산명신상>
장보고 본명은 궁복·궁파.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장보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서남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 소장이 되었다. 당에서 귀국한 뒤 828년(흥덕왕 3) 왕에게 청해를 진수할 것을 청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지금의 완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의 하나이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에게 내진 대사(大使)라는 직명도 다른 군진의 진두·두상 등 신라의 정규 관직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장보고동상>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와 함께 교관선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냈다. 일본측은 이를 사교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와 이충·양원등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장보고 장년의 상>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 원덩 현 츠산춘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그는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쟁탈전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와 그에게 의탁했다.
<전시관의 장보고무역광경>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는 정년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고 식읍2,000호를 봉해주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즉위와 함께 그를 진해장군으로 삼고 장복을 내렸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장보고전기관 향나무숲길>
845년(문성왕 7)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로 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듬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자객으로 보내 그를 살해하게 했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뒤에도 얼마 간 유지되었으며, 851년에야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지금의 김제)으로 옮길 수 있었다.
<장보고전기관전경>
장보고기념관은 한중수교 기념으로 한국인이 투자하여 2007년도에 개관하였다고 한다. 법화원과 적산면신상과 함께 둘러본다면 역사의식 고취와 함께 좋은 볼거리를 만들어 놓고 있으며, 적산을 한바퀴 등산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노인전문정신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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