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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속에 오르는 박달재 시랑산

바위산(遊山) 2010. 7. 19. 16:41

언   제 - 2010년 7월 10일(토)

누구와 - 마누라와

어데에 - 울고넘는 박달재와 시랑산

 

날씨는 푹푹 찌는데 멀리 있는 산을 찾아 가기도 찜찜하여 가까운데를 찾다가 박달재가 있는 시랑산을 찾아 간다. 시랑산은 치악산맥 남대봉에서 서남쪽으로 가지를 쳐 내려온 능선이 구학산(970m)을 솟구친 후 지금의 박달재에서 잠시 맥을 가라앉혔다가 마지막으로 솟구친 봉우리가 바로 시랑산이다. 해발 453m인 박달재에 이르면 스피커에서 왼종일 '울고 넘는 박달재'노래가 흘러 나와 시끌벅적하다. 그래도 세련된 것이 그전에는 한사람 음악이 연속해서 들렸는데. 요즘은 몇명의 남녀 가수가 부른 것을 돌려가며 들려주니 다행인 듯하다.

 

박달재로 오르다 보면 북쪽 구학산쪽으로 경은사가 보인다. 시랑산(侍郞山)은 제천시 백운면과 봉양읍의 경계에 자리한 해발 691m의 산이다. 시랑산은 오랜 세월 겨레의 심금을 울린 애창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 의 무대인 박달재가 자리한 산이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님아."로 시작되는 노랫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박달재가 천등산을 넘는 고개로 잘못 알고 있거니와 이는 사실이 아니다. 충주를 지나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이 넘던 고갯길 가운데 천등산을 넘던 고갯길은 '다릿재'요, 박달선비와 금봉낭자의 애틋한 사랑 전설이 전하는 박달재는 시랑산을 넘는 산길이다. 천등산(807m)다릿재와 시랑산 박달재는 15km이상 떨어져 있는데, 우찌하여 가요에 '천등산 박달재'라 가사를 붇혔는지 아리송하다. 

박달재에 오르면 휴게소 주변으로 목각인형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장승의 모습도 있지만 남녀의 은밀한 부분을 특징있게 묘사하여 한때 음란성을 이유로 철거를 논하기도 하였다. 박달재에는 금봉이와 박달이의 애닯은 전설이 있다. 조선중엽 장원의 부푼 꿈을 안고 한양으로 가던 경상도 젊은 선비 박달은 고개아래 촌가에 하룻밤 유하려다 길손을 맞이하는 금봉이의 순수하고 청초한 모습에 정신을 빼앗기고, 금봉도 박달의 준수하고 늠름한 모습에 잠을 못이루고 달밤을 거닐다가 역시 금봉을 그리면서 서성이던 박달을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몇날을 머물며 금봉과 사랑을 속삭이던 박달은 과거에 급제한 후에 혼인을 하기로 언약하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떠나고 그날부터 금봉은 박달의 장원급제를 서낭신께 빌었으나 과거가 끝나고도 박달의 소식이 없자 크게 상심하여 고개를 오르내리며 박달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다가 한을 품고 삶을 거두고 말았다. 한양에 온 박달도 과거준비를 잊은 채 금봉이를 그리는 시만 읊다가 낙방을 한 후 금봉이를 보기가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다 금봉의 장례 사흘 후 되돌아와 금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땅을 치며 목놓아 울다가 언뜻 고개를 오르는 금봉의 환상을 보고 뒤쫓아 가서 와락 금봉을 끌어 안았으니 금봉의 모습은 사라지고 박달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고 전한다.

휴게소 동편으로 김취려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서있다. 김취려 장군은 고려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언양. 아버지는 예부시랑 부(富)이다. 음서로 등용된 뒤 동궁위를 거쳐, 장군으로 동북국경을 지킨 뒤 대장군이 되었다. 1216년(고종 3) 대요수국을 세웠던 거란의 일부가 몽고군에 쫓겨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왔다. 이때 그는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과 연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 1217년 거란군 5,000여 명이 제천까지 쳐내려오자, 전군병마사로 임명되어 거란군을 명주(강릉) 쪽으로 패주시켰다. 1218년 거란이 다시 침입하자 병마사가 되어 서북면원수 조충과 함께 강동성으로 쫓아냈다. 몽고군·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1219년 의주에서 한순·다지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극서·이적유와 함께 평정했다. 지정사 판호부사를 거쳐, 1228년에는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가 되었으며, 그뒤 시중이 되었다. 고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위열이다. 김취려 장군이 걸안군을 무찌른 해가 1217년(고종 4년)으로, 별초군이 몽고군을 격퇴한 해가 1258년(고종 45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옛땅으로 '밝뫼고개' 라고 불리던 이고개는 수천년 동안 겨래의 삶을 지켜내고 강인한 민족혼을 유감없이 발휘한 빛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산행 들머리는 주로 제천시 백운면 모정1리에서 오르나,  오늘은 박달재에서 오른다. 낙엽송과 관목이 빼곡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주변에 이름모를 야생화가 군데군데 피어 있어 정취를 더한다. 등산로는 잘 발달되어 있어 걷기가 좋다. 지능선에 오르면 능선의 끝으로 작은 바위지대가 있고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곳에 국조단군을 기리는 비가 있다. 이곳에 서면 북으로 구학산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이곳에는 '국조단둔대황조성령(國祖檀君大皇祖聖靈), 삼선사령영사령(三仙四靈令司靈), 백운산성화신령(白雲山聖化神靈) 국사산왕산신지령(國祠山王山神之靈)' 이라고 쓰여진 세 개의 비석이 몇 그루의 노송 및 바위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곳에서 지능선을 타고 오르면 주능선에 오르게 된다. 주능선에는 여러갈래의 등산로가 나온다. 그러나 이정표가 없고 수목이 시야를 가려 방향설정이 어렵다.

 

주능선에서 길을 잘 못 들었는가 보다. 한참을 걷다보니, 계속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이러다 다시 오르겠지 하며 걷다보니, 마을이 나온다. 주민들에게 물으니, 이 마을이 '모정리'란다, 에구~시랑산은 어데두고 산의 반대쪽으로 내려왔으니, 다시 주능선으로 오르는데 40분쯤 걸린다.(제천시장님 안내판좀 설치해줘유!) 다시 주능선으로 오르는 길에는 바위지대도 보이고, 층층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어 하늘을 가린다.  

 

 

 

 

 

 

 

 

다시 주능선으로 올라와 서릉을 타고 간다 서릉을 타고 가다보면 송전탑이 나온다. 송전탑에서 가파르게 오르면 작은 봉우리를 넘어 바위지대가 나온다. 바위지대는 우회로가 없어 조심조심 올라야 한다. 바위지대를 지나 작은 봉우리에 오른다음 안부로 내리섰다가 다시한 번 가파르게 오르면 시랑산 정상이다. 정상은 좁고 남서는 수림에 가려 조망이 되지 않고 북동이 트여 있으나, 개스로 인하여 조망이 시원찮다. 이곳에 충청북도의 전형적인 4각 정상석이 앉아 있다. 

  

 

정상에서 다시 오던길로 하산을 한다. 능선에는 구불구불하게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가 늘어서 있어 운치를 더한다. 그러나 저러나 운치고 뭐고, 찌는 듯한 더위에 먹거리도, 물도 없이 달랑 카메라 한개 들고 온것이 화근이다. 2.5시간~3시간이면 충분하겠지 하였는데 그넘의 알바때문에 점심때도 훨 지나고 더구나 비오듯 흐르는 땀을 대신할 물한모금 마시지 못했으니, 저혈당이 오는 것 같다. 사지가 축 늘어지고 두다리에 힘이 쪽 빠져버린다. 그렇다고 여기서 눌러 앉을수도 없지 않은가?

주능선에 올랐다가 서릉을 타고 내리는데, 그만 이길도 바위지대가 나오고 뚝 끊기고 만다. 에고~ 또 알바다. 다시 돌아가기도 그렇고 하여 박달재에서 들려오는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이라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무조건 줄줄 미끄러지며 급하강을 한다. 하산을 하니, 박달재 오르는 길에 있는 통나무속에 부처를 모시는 암자가 나오고, 박달재 장승전시장이 나온다. 두세시간이면 족하리라 생각한 산행시간은 두번의 알바로 4시간이 훨 넘기고 산행을 마친다.

장승전시장은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놓았다. 장승과 원수가 진 사람이 이곳에 살아는지, 장승의 갯수가 만만치 않다. 장승에 공을 드렸으니, 이번엔 좀 더 참신한 아이템을 가미하여 좀 더 볼거리를 풍족하게 한다면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더없이 좋은 산책로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저러나 갈증도 심하고 배도 고파서 캔맥주 한통 까제끼니, 조금은 살 것 같다. 시랑산은 작은 산이고 능선이 부드럽고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여 인근에 있는 '자양영당'을 같이 둘러보는 가족산행지로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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