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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샐던(7~12강)

바위산(遊山) 2011. 3. 23. 00:05

제7강 <거짓말의 교훈>
임마누엘 칸트의 엄격한 도덕이론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칸트는 비록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거짓말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따라 칸트 역시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시간에 샌델 교수는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칸트의 이론을 시험해보도록 한다. 자기 집에 숨어있는 친구를 죽일 목적으로 살인자가 찾아와서 노골적으로 그 친구가 집에 있는지 묻는다. 이런 경우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잘못인가? 잘못이라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인자를 오해하게 만들어 친구를 구할 방법은 없을까? 샌델 교수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추문을 교묘한 말로 부인한 청문회관련자료를 보여주면서 노골적인 거짓말과 상대를 오인하게 만드는 호도성 진술의 차이를 생각해본다. 이것을 통해 칸트가 말한, 진실을 말함으로써 도덕법(정언명령)을 준수하는 것이 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행동인지 살펴본다.

또한 현대철학자 존 롤스의 정의론을 살펴본다. 롤스에 따르면 정의의 원칙들은 실제계약이 아닌 ‘가상의 사회계약’으로부터만 도출될 수 있다. 실제계약은 각 이해세력의 출신배경이나 협상력, 지식의 차이와 같은 임의적 요소들이 개입되므로 항상 공정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를 공동으로 지배할 정의의 원칙들은 실제계약이 아닌 가상의 계약으로부터 도출된다. 롤스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나이나 성별, 인종, 지식, 힘, 사회적 지위, 가정환경이나 종교, 인생의 목표마저 모르도록 ‘무지의 장막’에 가려진 상황을 가정한다. 이 ‘무지의 장막’에 가린 상태에서는 모든 사람이 원초적으로 평등한 입장에 놓이게 되므로 특수한 이해관계를 배제한 정의의 원칙에 합의할 수 있으며, 무지의 장막이 걷히고 불행하게도 자기가 최하위계층으로 판명 날 경우를 대비해 약자를 배려하는 차등의 원칙을 채택할 것이라고 한다. 샌델 교수가 제시한 재미있는 사례들(바닷가재를 잡아온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계약자, 어린아이들의 야구카드거래, 물이 새는 변기, 데이비드 흄과 도색업자의 소송, 자동차수리업자 샘, 바람난 배우자)을 통해 공정한 계약이란 무엇인지, 정의의 원칙들은 어떻게 도출되는지 생각해보자.

 

제8강 <공정한 출발>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은 정당한가? 연소득이 3100만 달러인 마이클 조던이나 수백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한 빌 게이츠의 입장에서 보면 부당한 일일 수도 있다. 반면 최하위계층의 입장에서 보면 단지 재능을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더 좋은 가정환경에서 온갖 혜택을 누려왔다는 이유로, 이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자신의 몫이라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물론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 노력 때문에 소득과 분배의 불균형이 발생하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이것이 전적으로 자기의 공이라 주장할 수 있는가? 정의로운 분배원칙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존 롤스의 대답은 평등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이다. 무지의 장막에 가려진 사람들이 원초적 입장에서 선택할 정의의 두 원칙, 특히 차등의 원칙은 분배정의를 논하는 핵심이다. 차등의 원칙이란 선천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재능을 발휘해 얻은 이익의 일부를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쓴다는 조건 하에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용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은데 자기소유나 노력, 동기부여를 강조하는 반박과 그에 대한 롤스의 대답이 설득력이 있는지 평가해보자.

샌델 교수는 지금까지 토론한 내용을 자유주의사회, 능력주의사회와 롤스의 평등이론으로 요약하고, 현대사회의 임금격차가 공정한지 질문을 던진다. 판사의 평균 연봉은 20만 달러가 약간 안 되는 반면 TV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주디 판사는 열 배가 넘는 250만 달러를 번다. 미국 교사들의 연봉은 4만 달러가 약간 넘는데 Late Night Show를 진행했던 데이비드 레터맨의 연봉은 310만 달러다. 이런 격차는 공정한가? 존 롤스는 아니라고 한다. 개인이 성공하는 데는 타고난 행운, 뛰어난 유전자, 좋은 가정환경처럼 후천적 노력과는 무관한, 도덕적으로 볼 때 자의적인 요소들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연히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기 재능을 높이 평가해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뛰어난 법률가도 수렵사회나 전사를 우대하는 사회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크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법률가로서 그 사람의 재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 상대적으로 빈곤한,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를 점한 사람에게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도덕적으로 볼 때 이런 자의적 요소들이 분배의 기준이 된다면 그 원칙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공정한 분배정의는 무엇일까? 롤스는 분배의 문제를 도덕적 자격이 아닌 합법적 권한의 문제로 본다. 이 둘을 구분하는 도덕적 함의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제9강 <소수집단우대정책>
지난 시간에 토론한 소득과 재산에 있어서의 분배정의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교육과 입학, 입사 기회에 있어서의 분배정의에 대해 알아보자. 셰릴 홉우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와 전문대를 자력으로 졸업하고 텍사스 주립대학 로스쿨에 지원했지만 탈락했다. 홉우드는 시험성적이나 졸업평점이 자기와 같은 소수인종은 합격한 반면, 자기는 백인이란 이유만으로 탈락했다며 1996년 텍사스 로스쿨을 고소했다. 셰릴 홉우드가 백인으로 태어난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닌데, 또 과거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닌데 소수집단우대정책의 희생양이 된 것인가? 아니면 상대적으로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백인보다 학업성취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소수인종의 경우 같은 점수라도 그 잠재력에 가산점을 매겨 불평등을 바로 잡는 것이 옳은가? (시정 논리) 또는 노예제도나 인종차별 같은 과거의 잘못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인 소수인종은 교육여건의 불평등에 상관없이 보상해야 하는가? (보상 논리) 그것도 아니면 다양성 증진이라는 대학의 사명에 따라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지지해야 할까? (다양성 논리) 이 사명 때문에 개인의 권리가 침해당한 것은 아닌가? 대학의 사명은 대학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인가? 소수집단우대정책을 둘러싼 열띤 토론을 살펴보자.

현대철학이 기존 철학과 구분 되는 결정적인 차이는 분배정의를 도덕적 자격에서 분리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자유지상론자도 존 롤스 같은 평등론자도, 칸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분배정의를 다른 관점에서 본 철학자도 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그 목적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것이다. 가령 제일 좋은 플루트는 돈이 많은 사람이나 신분이 높은 귀족, 잘생긴 사람이 아니라 플루트를 제일 잘 부는 연주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플루트의 존재이유, 목표, 목적, 즉 텔로스가 바로 연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제일 좋은 테니스 코트 사용권도 돈 많은 사람이나 거물, 위대한 과학자가 아니라 테니스를 제일 잘 치는 선수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의란 개인의 덕목에 딱 맞는 역할을 찾아주는 것이다. 소수집단우대정책을 둘러싼 논쟁 역시 대학의 사명, 대학의 목적이 자의적으로 정할 수 없는 정의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추론을 언급할 수 있다.

 

제10강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정치>
정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현대정치철학의 주된 관심사가 소득과 재산, 기회의 공정한 분배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된 관심사는 공직과 명예의 분배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개인이 응당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것, 개인에게 딱 맞는 역할을 찾아주는 것이다. 이런 합목적적 추론은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에게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미덕을 배양하는 것이고 국가와 정치공동체의 텔로스(목적)는 ‘행복한 삶’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폴리스에 살도록 정해진 존재이고 인간의 본성은 정치에 참여해 고유한 언어능력을 발휘할 때 완벽히 실현된다. 그럼 폴리스에서의 발언권, 정치권력은 어떻게 할당해야 할까? 최고의 공직과 명예는 누구에게 주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이 공동체의 목적에 가장 많이 공헌한 시민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동체의 목적, 사회적 행동의 목적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현대의 골프논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선천적으로 다리에 혈액순환장애를 안고 있는 프로골퍼 케이시 마틴은 프로투어에서 골프카트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PGA에 요청했다. PGA가 이 요청을 거절하자 마틴은 협회를 고소했고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간다. 골프의 목적은 무엇인가? 골프코스를 걷는 것이 골프의 필수요소인가? 여기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배정의를 논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한 두 요소, 목적과 명예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한 삶’이다. 이 목적에 따라 개개인에게 딱 맞는 역할을 찾아주는 것이라면 개인의 권리나 선택의 자유는 없는 것일까? 내가 어떤 일에 가장 잘 맞는다고 해도 내가 그 일을 원치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제 옹호는 바로 이런 개인의 권리나 자유를 침해한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반박에 어떻게 대답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론들을 살펴보고 칸트와 롤스로 대표되는 현대정치철학과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자.

제11강 <충성의 딜레마>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목적적 정치론을 비판하며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 정치가 ‘좋은 삶’의 기준을 정해놓고 그에 딱 맞는 역할을 개인에게 찾아주는 거라면 강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선’인지는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고 그 권리를 공정하게 보장하는 정의의 기틀만 마련해주자는 것이 칸트와 롤스가 생각하는 자유주의적 정치론이다. 우리 인간을 합목적적 자아가 아닌 자유주의적 자아로 볼 때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각자가 생각하는 선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이 권리를 존중할 의무가 있다(자연적, 보편적 의무). 또 계약처럼 선택이나 합의에 따라 자발적으로 생기는 의무도 있다(자발적 의무). 자유주의는 이렇게 모든 의무를 자연적, 자발적 의무로 설명한다. 문제는 자기가 선택하거나 합의하지 않은 일은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식의 극단적 개인주의이다. 미국의 노예제나 나치독일의 유태인학살처럼, 과거로부터 전수된 공동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역사적 기억상실 태도는 도덕적 불감증으로 비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주의자들이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연적, 자발적 의무 외에 세 번째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소속, 연대, 충성의 의무다. 자유주의적 자아개념에 반대하는 매킨타이어의 ‘서사적 자아 개념’은 개인을 소속 공동체의 일부로 파악함으로써 공동의 책임을 포용한다.

문제는 자기가 속한 여러 공동체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이다. 어떤 기준으로, 어떤 의무를 선택해야 할까? 물에 빠진 자기 아이와 남의 아이 중 누구를 구해야 할까? 연로한 남의 부모와 자기 부모 중 누구를 부양해야 할까? 같은 방을 쓰는 친구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걸 목격했다면 공동체의 정의수호를 위해 친구를 고발해야 할까? 흉악범인 형을 보호하려고 법정에서 진술을 거부한 동생의 행동은 보편적 의무를 저버린 부도덕한 일일까? 나치에 점령당한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전투기조종사는 자기 마을을 폭격해야 할까?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이 ‘충성 딜레마’에 대한 토론을 통해 공동체주의가 극복하려 한 것은 무엇인지, 또 그 한계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제12강 <정의와 좋은 삶>
정의는 좋은 삶에 대한 질문에서 분리될 수 있는가? 정의의 원칙을 정하는 문제는 결국 올바른 도덕적, 본질적 가치의 문제로 귀결되지는 않는가? 만일 정의를 선이나 좋은 삶에 결부시킬 수밖에 없다면 다원적 사회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선이나 좋은 삶은 모두 다른데 어떻게 공동선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오늘은 칸트와 롤스의 자유주의적 정의론에 대한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을 검토하며 정의는 선에 결부될 수밖에 없고 공동선을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동성혼 문제를 토론해본다.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처럼 소속, 연대, 충성의 의무가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자연적, 자발적 의무, 인간의 보편적 의무에 종속돼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정의론은 항상 보편적 의무를 특수한 의무보다 우선시한다. 문제는 몬테스키의 명언처럼 언제나 보편적 의무를 우선시하는 도덕군자에게는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모두가 도덕군자가 되는 이런 사회는 실현 불가능할뿐더러 인간사회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서사적 자아개념, 제 3의 의무를 말하면서 정의를 선의 문제로 보는 공동체주의자들의 입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정의를 선에 결부하는 방식도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이다. 첫째는 노예제를 옹호한 미국 남부인들처럼 정의를 특정한 사회의 공통된 이해, 전통으로 보는 시각이다. 이때 정의는 상대적인 개념이 되고 특유의 비판적 성격을 상실한다. 반면 정의를 본질적 선에 결부하는 두 번째 방식, 비상대적 접근도 있다. 엄밀히 말해서 공동체주의라고 할 수 없는 이 방식을 동성혼이나 낙태 문제에 적용해보자.

동성혼 문제는 정의와 권리의 개념이 모두 포괄된, 사회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판단해야 하는 문제다. 또한 결혼의 목적, 동성혼의 도덕성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므로 정의와 선의 관계를 토론하기에 적합한 주제다. 기독교에서 말하듯 동성혼은 죄악이기에 이성혼만 인정해야 할까? 동성혼도 이성혼처럼 인정해야 할까? 아니면 애초에 결혼을 인정하는 건 국가의 역할이 아닐까? 열띤 토론을 마치고 이견들을 정리하며본 강의의 주제였던, 정치철학이 추구하는 공동선의 정치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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