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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생신에 갑자생을 말한다.

바위산(遊山) 2006. 4. 18. 21:24

아버님의 생신을 맞이 하였다.

원래는 1923년 생이니 올해로 84세이시다.

호적이 한살 줄어 1924년 갑자생으로 살아 오셨다.

20세기 격동의 회오리가 몰아친 한반도에서 그 회오리의 가장 중심축에 끼어 온몸으로 버티며 살아 오신 분들이 갑자생이다.

 

일제의 수탈과 압제하에 태어나 일본어 교육을 받고(그나마 학교 교육을 받음 다행이지만) 2차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40년대 초에 징병과 징용 1기로 전쟁터에 나아가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행운으로 여기던 세대가 갑자생이다.

 

"묻지마라 갑자생"(강제 징병시에 갑자생은 무조건 해당 된다는 뜻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이라는 용어가 나 돌 정도로 그 시절의 갑자생은 한참 혈기 왕성한 젊음을 일제의 강제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 아까운 청춘을 유린당하고 생명을 빼앗겼다.

 

해방과 함께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 피터지는 이념 대결의 행동대 역으로 그들은 또 한번의 회오리 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그것도 잠시 6.25의 전장에 휩쓸리게 된다.

 

4.19와 5.16을 거치면서 새마을 운동의 선봉대로 조국근대화와 경제발전의 역군으로 젊음을 보내고 이미 유명을 달리 하신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나의 아버님은 아직도 생존해 계신다.

십여년전만 하여도 몇 안되는 동창분들이 모여 곡차를 즐기시더니 지금은 연락되는 분들이 한분도 안계신다.  

모두 세상을 등지셨는가 보다.

아버님도 가끔 말씀하신다."친구들 중에 내가 제일 오래 살었어!"라고...

 

제작년까지만 하여도 차를 타고 바람쐬기를 좋아 하시고 드시고 싶은 것 사드리면 너무 좋아 하시니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산행후에도 틈만나면 찿아 뵙고 즐겁게 해드리려 했는데 이제 기력이 너무 쇠잔하시어 움직이시기도 힘들어 하시고 드시고 싶은 것도 드시질 못하시니 마음이 아프다.

 

요즘 소일거리는 가끔 공원에 나가 앉아 계시다 봉사자들이 나누어 드리는 점심을 얻어드시고 귀가 하시면 줄 곳 누워만 계신단다.

 

가난 때문에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야간학교를 다니시며 공부를 하시고 해방후에는 연초공장에서 기계과장과 공장장을 하시다 1.4후퇴 때 어머님이 누님을 출산하여 피난을 가다 되돌아와 북한정권의 강권에 의하여 공장을 가동하고 수복후엔 북한정권에 협조한 부역자라는 낙인으로 얼마 안되는 농토와 씨름하며 평생을 시골에 은둔하여 지내시며 어렵게 6남매를 키우셨다. 

 

유학시절, 일본학생들을 제치고 항상 선두로 커다란 트렁크에 그득한 상장을 보여 주시던 아버지....

머리가 비상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수재로, 나름대로의 지식인으로, 항상 날개를 펴고 싶은 욕망으로 정치판도 기웃거리고 시골유지의 모습을 지키려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며 뒤에서 힘들게 내조를 하신 어머님의 고생 또한 적지 않으셨다.

 

이번 아버님의 생신을 맞아 둘째 아들인 내가 청주에 계신 아버님과 여기저기 흩어진 친지를 불러 제천에서 모시게 되었다. 

조촐하지만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고 가까운 주변관광지를 돌았다.

특히나 일제하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60여년 만에 돌아오신 외삼촌, 이모님, 외사촌들이 멀리서 찿아주시니 감사하기가 그지 없다.

언젠가는 조선족, 그 비극의 역사를 정리하여 보고싶다.    

 

아버님, 어머님 만수무강하옵소서!

 

(중국에서 건너온 외가집 가족들)

 

          (연로하신 울 아버님)

   (고생 많이도 하신 울 어머님)

 

(수안보에서 이별전의 만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