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신흥사-흔들바위-울산바위)
<울산바위>
설악산은 한반도의 중추인 백두대간중에 가장 높은 대청봉(1708m)을 정점으로 동북쪽의 금강산과 동남쪽의 오대산 사이에 솟아 있으며 한라산 지리산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높은 명산이다. 설산 또는 설봉산 등으로도 부르는 설악산은 깊은 계곡의 맑은 물과 신록 단풍이 고찰의 단청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어 세계 10대 명산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시령 내림길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한계령과 미시령을 경계선으로 동해쪽은 외설악, 서쪽(인제군)은 내설악, 양양군의 오색일대를 남설악이라 부르는데, 외설악 쪽으로는 관광의 입문이라 할 수 있는 설악동을 거쳐 경승지 도로 양편을 흐르는 쌍천 유역이 흥을 돋우는 가운데 설악산의 중심부를 이루는 대청봉과 관모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버티어 있다.
유명한 천불동 계류는 대청봉에서 비롯되어 북쪽으로 흐르고 있는데 이 물줄기를 따라 와선대 비선대 금강굴 천당 폭포등 천불동계곡, 울산바위, 권금성, 금강굴, 귀면암, 비룡폭포, 오련폭포, 토왕성폭포등 기암절벽과 큰 폭포들이 많이 있으며, 설악은 백담계곡, 수렴동계곡, 구곡담계곡, 가야동 계곡, 십이선녀탕계곡, 용아장성, 귀때기골 그리고 장수대 지역의 대승폭포, 옥녀탕 등이 아름답고 산세가 빼어나다.
<신흥사 일주문>
설악동에 주차를 하고 신흥사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설악동은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외국관광객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저 외국인들은 설악의 백미인 공룡, 용아, 화채능선의 진가를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씁쓸한 마음이다. 환경을 최대한 보존하는 한도에서 권금성에서 신선봉을 거쳐 용대방향으로 케이블카를 설치하여 남여노소 누구나 아름다운 설악의 절경을 보도록하고 외국관광객도 유치하여야 할 것 같다.
<신흥사 청동좌불>
신흥사는 신라 진덕여왕 6년(652)에 자장이 ‘향성사’라는 이름으로 세웠으나 698년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 뒤 의상이 ‘선정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워 1000여 년간 번창하다가 조선 인조 20년(1642) 화재로 또 다시 소실되었다. 2년 후인 1644년경 영서, 혜원, 연옥 세 스님이 선정사 아래쪽에 절을 세웠는데, 이 절이 지금의 신흥사이다.
1947년 대웅전을 시작으로 여러 건물들을 차례로 다시 세움으로써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보전, 명부전, 영산전, 보제루 등을 비롯하여 3개의 문(門)과 여러 부속 암자가 있다. 신흥사 극락보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은 현종 5년(1664)년에 세운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명부전에는 부처를 도와 지옥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을 모셨고, 보제루에는 휴정 등 고승 60여 분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1400여년 전 ‘향성사’시절의 범종은 한국전쟁 때 총상을 입은 뒤 수리하여 보존 중이다.
언 제 : 2011년 12월 17일(토) 맑음.강추위
누구와 : 창민산악회(11명)
어데에 : 설악산 울산바위
신흥사를 지나자 등산로 옆으로 꽤나 많은 눈이 쌓여있어 설악의 명성을 헛디게 하지 않는 것 같다. 아주 옛날 소시쩍에 한 번 찾아 온 적이 있는 울산바위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창민산악회 정기산행을 울산바위로 택하였다. 내원암을 지나 계조암까지 가는 길은 부드러운 계곡트레킹으로 그리 어려운 구간은 없다.
계조암까지 가는 길에는 화장실을 갖춘 두개의 휴게소가 나온다. 휴게소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호객서비스가 지나칠 정도이나, 불행하게도 매상을 올려주지는 못하고 계조암으로 향한다. 추위도 예상보다는 걱정할만큼은 아니고 바람도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 걷기가 아주 좋다.
<산신각>
<울산바위>
<계조암>
산신각을 지나면 거대한 울산바위 아래쪽에 자리한 계조암에 다다른다. 계조암은 신흥사의 산내 암자이다. 흔들바위 앞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사이에 자리하고 바위밑 석굴에 불당을 차려 놓았다. 신라 자장율사가 수도하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하는데 그 뒤 원효·의상·지각·봉정 등 여러 조사(祖師)들이 대를 물려 수도하였다고 하여 이름이 계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계조암이 들어앉은 바위가 목탁 바위인데 이 암자는 목탁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다른 절에서는 10년 걸릴 공부도 5년이면 끝낼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난하지만 마음이 착한 오누이가 오붓하게 살고 있었다. 오빠는 어찌나 힘이 센지 이 마을 사람은 물론 인근 마을사람들 까지도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성이 양씨인 이들 오누이는 어느듯 세월이 흘러 두 오누이는 장가들고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암벽엔 한자로 덕지덕지 음각~뭐라카는지???>
동생인 양처녀도 얌전하고 예쁘기가 천사와 같았다. 양총각은 항상 동생인 양처녀를 좋은 집에 시집보내는 일이 걱정 이였다. 그와는 반대로 동생은 오빠가 빨리 색싯감을 고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양총각에게는 마땅한 배필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아랫마을에 사는 부잣집에서 양처녀에게 청혼이 들어왔다. 나무랄 데 없는 청년이어서 오누이는 쾌히 승낙을 하고 이듬해 봄에 성혼하기로 결정하였다. 오빠는 그날부터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한푼이라도 더 벌어서 동생의 혼수마련을 많이 마련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동생이 시집을 가는 길엔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가마를 타고 건너기가 어려움을 알고 큰 내에 커다란 돌멩이를 들어다가 징검다리도 만들어 놓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짚더미 같은 바위를 마치 자갈이나 돌맹이 다루듯 하였다. 그런데 그해 나라에선 큰 전쟁이 일어나 모든 장정들이 전쟁터에 뽑혀나갔다. 양총각도 다른 장정들과 마찬가지로 전쟁터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얼어서 그런지, 안흘들려...ㅠㅠ>
동생 결혼식을 몇 달 앞두고 전쟁터에 나가는 오빠의 마음은 찢어 질 듯 아팠다. 양장사는 결혼식 전에는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누이동생과 헤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3월이면 돌아오겠다 던 오빠는 2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아랫마을 총각은 이미 정혼한 사이이니 혼례를 올리자고 하지만 양처녀는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는 식을 올릴 수가 없다고 거절하면서 날마다 매봉에 올라 높은 바위에 앉아 오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조암 석굴불당>
아랫마을 총각은 기다리다 못해 다른 집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말았다. 그렇게 1년이 또 지난 어느 날 매봉바위 위에 올라앉아 오빠를 기다리던 양처녀는 그대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 며칠이 지난 후 전쟁터에서 큰공을 세운 오빠는 장수가 되어 돌아 왔으나 몽매에도 잊지 못했던 누이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사람들로부터 누이의 소식을 전해들은 오빠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슬픔에 빠졌다. 가엾은 동생의 한을 어떻게 풀어줄 것인가를 몇 날 며칠 동안을 식음도 전패 한 채 바위를 치며 슬퍼하였다.
이때 양장사가 바위를 내리치는 바람에 그 큰 바위가 두동강이 났다. 그 뒤로 이 바위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들흔들 하는 것이었다. 오빠는 죽은 여동생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흔들바위 옆에 큰 바위를 들어다가 놓고 그 위에 사모관대 모양의 바위를 얹어 신랑과 같이 만들어 놨다. 후에 마을 사람들이 흔들바위가 밑으로 굴러 떨어질까 두려워서 장정들을 불러모아 밀어 드리려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바위를 건드리자 갑자기 매봉위에 검은 먹구름이 몰리더니 천둥과 번개를 치면서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후로 이 바위를 그대로 두고 흔들바위라고 불러오고 있다.
계조암을 지나면 등산로는 차츰 가파라진고, 바람도 제법 몰아친다. 눈덮힌 송림사이를 지나면 거대한 암봉인 울산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크라이머들은 암벽에 자일을 걸고 오르지만 일반인들은 암봉사이로 나있는 철계단을 타고 오를 수 있다.
울산바위는 동양에서 가장 크고 멋진 단일암봉이다. 울산바위로 오르는 길은 설악동 소공원의 신흥사 옆으로 나있고 중간에 흔들바위가 있다.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고 정상에 오르면 대청봉도 보이고 외설악 전경도 눈에 들어온다. 소공원에서 울산바위 정상까지 왕복하는데는 3-4 시간이 소요된다. 해발 873m의 울산바위는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둘레가 4km이며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그 경관은 선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곳 울산암은 암벽등반이 아니고도 계단을 통해 걸어서 울산암 꼭대기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라이머들은 계단이 아닌 암벽으로 등반을 하여 울산암을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설악산은 암벽등반 대상지가 이곳 말고도 비선대 장군봉과 적벽.그리고 최근에 개척된 소토왕골의 암장등 큼직한 암장들도 많다.
그중에서도 울산암은 외설악 학사평과 내원골 사이에 동서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해발 873m, 총길이 2.8km에 달하며 30여 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진 국내 최대의 암벽이다. 울산암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암장의 폭이 600m, 최대 높이가 200여m에 달한다.
울산바위의 명칭은 3가지설이 있는데 하나는 울타리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과 경남 울산의 지명을 딴 전설적인 이름, 또 하나는 우는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등이 있다. 울산바위 허리에 구름이 휘감기면 흡사 구름 꽃송이가 피는 것 같다.
울산바위는 울타리 같이 되어있다 하여 한문으로 쓰면 이산(籬山)이고, 우리말로 울산바위, 울타리 바위라 한다. 그래서 속초의 지명은 울산바위를 풀단으로 묶었다해서 "속초"라 한다. 지금으로부터 340년전 인종 때 택당이 간성군수로 있을때 '택당지'라는 책을 하나 썼는데 그 속에 간성군지가 들어 있다. 택당이 울산바위를 천후산이라 썼다. 하늘 천(天), 사자울음 후(吼)로 하늘이 사자울음 소리를 낸다해서 하늘이 우는 산이다. 라는 뜻이다.
울산바위에 가면 구멍이 움푹파인 데가 여러 군데 있다. 근데 바람이 그 구멍에 들어갔다 나올 때 우~ 하고 소리가 난다고 한다. 바람이 세서 큰 소리가 났다 하여, 이를 하늘이 운다해서 그 지방 사람들이 천후산이라고 '택당지'라는 책에 쓰여 있다. 울산바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산신령이 금강산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을 만들까 하고 며칠간 궁리하던 신령은 묘안을 하나 얻었다. 1만2천 개의 봉우리를 각각 그 형체가 다르게 조각하면 훌륭한 모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강산에는 그만큼의 바위가 없었다. 그래서 신령은 전국 각지 산에다 큰 바위는 모조리 보내도록 엄명을 내렸다. 바위들은 모두 금강산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이때 경상도 울산 땅 큰 바위도 누구에게 뒤질세라 행장을 차려 금강산 여정에 올랐다. 원래 덩치가 크고 미련한 이 바위는 걸음이 빠르지 못해 진종일 올라왔으나 어둠이 내릴 무렵 지금의 설악산에 당도했다.
날은 저물고 다리도 아프고 몸도 피곤해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에라 이왕 늦은 김에 이곳에서 하룻밤 쉬고 가자.』하룻밤을 편히 쉬고 다음날 아침 금강산으로 떠나려고 막 한 발자국을 내디디려는데 금강산 신령이 보낸 파발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젯밤 자정으로 금강산은 이미 1만2천봉을 다 채웠으니 오지 말라는 분부요.』바위는 기가 막혔다. 어찌나 분하고 섭섭했던지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길도 아득할 뿐 아니라 체면도 말이 아닐 것 같았다. 한참 넋을 잃고 우는 바위의 모습을 지켜보던 금강산 사자는 몹시 딱했던지 바위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이 설악산이 금강산만은 못하나 울산 땅보다야 나을 것이니 여기서 머무는 것이 어떠하겠소.』이 말을 들은 바위는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로 작정했다. 이 바위가 「울산바위」라 불리우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울산에서 왔으니 그렇게 부르자는 설악산의 공론에 따른 것이며, 바위 밑에 지금도 맑게 흐르는 물은 그때 위가 흘린 눈물 탓이라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몇 천 년이 지나 배불숭유 정책을 쓰던 조선시대였다. 울산바위 얘기를 들은 울산 원님은 은근히 배가 아팠다. 울산바위를 뺏긴 것도 억울한데 설악산이 금강산 다음으로 아름답다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며칠 간 끙끙거리던 원님은 어느 날 묘책을 떠올렸다. 설악산 신흥사를 찾아가 스님들을 골탕먹이자는 계획이었다. 유생들이 득세하던 그 당시 스님 몇 명 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어느 날 해가 으스름할 무렵 신흥사 뜰에 교자 한 채가 놓였다. 『여봐라, 울산고을 원님의 행차시다. 주지 계시느냐?』포졸이 거드름을 피우며 주지 스님을 불러댔다.
<울산바위>
<손시려 죽갔구만, 자꾸 사진 찍어 달라고...ㅠㅠ>
『스님, 요즘 무슨 걱정이 있으신지요?』『너는 상관할 일이 아니다.』『소승에게서 혹시 좋은 방안이 나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동자승이 캐묻자 주지 스님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동자승은 그런 일쯤 가지고 무슨 고민을 하시느냐며 바위세를 받으러 오거든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드디어 원님행차가 당도했다. 주지 스님은 동자승의 말이 하도 당돌했던지라 슬며시 동자승을 불렀다. "우리 절에선 울산바위가 아무 쓸모가 없소. 그 바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 자리에 곡식을 심어 수확을 올릴 텐데 매년 손해가 큽니다. 그러니 세를 받기로 한다면 오히려 우리지 당신네가 아닙니다. 금년부터 세를 못 내겠거든 바위를 당장이라도 파 가시오.』
<속초와 동해바다>
동자승의 말이 한 치 빈틈없이 조리에 맞자 기세가 당당하던 원님도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냥 지고 말 수는 없는 터였다. "그러면 네 말대로 바위를 파 갈 터이니 내가 시키는 대로 만들어 놓아라" "원하는 대로 해 줄 터이니 꼭 가져가기나 하시오." "좋다. 새끼를 태운 재로 바위를 묶어 놓아라. 한달 후에 와서 끌어 갈 것이니라." 지 스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새끼를 태운 재로 둘레가 십 리나 넘는 바위를 묶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나 동자승은 생글생글 웃으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이튿날 마을 장정들을 수십 명 사서 새끼를 꼬게 했다. 스무날쯤 지나 새끼가 산더미같이 쌓이자 동자승은 소금을 몇 섬 물독에 풀어 새끼에다 염국을 들였다. 그리고 나서 청년들을 데리고 울산바위에 올라가 바위둘레를 새끼로 매는 것이었다.
그리곤 이삼 일 후 다시 바위에 올라가 새끼에 들기름을 바르더니 거침없이 불을 붙였다. 기름 묻힌 새끼줄은 잘렸지만 소금물에 절였으므로 겉만 그을려 꼭 재같이 보였다. 동자승의 기지는 놀라웠다. 감족같이 불에 탄 재로 그 큰 바위를 묶었으니.『제 놈들이 감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원님은 약속된 날 바위세를 받아갈 마바리까지 끌고 왔다. 새파랗게 질려 바칠 줄 알았는데 태연한 채, 어서 바위를 끌어가라는 말에 원님은 내심 놀랐다. 『이놈들 거짓말을 해도 분수가 있지 나를 놀리려 드느냐.』『가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원님은 망신을 무릅쓰고 울산바위까지 올라갔다. 이게 웬일인가. 정녕 불에 탄 새끼로 칭칭 감아 놓은 것이 아닌가. 『허, 그놈들 꾀가 대단하군. 이제 바위세 받긴 다 틀렸구나.』그 이후부터 신흥사는 지긋지긋하던 바위세를 물지 않게 되었다.
전설 갔다 붙히다 보니, 줄이 밀려버렸다. 울산바위 오름길엔 바람이 많이 불고 간헐적으로 강풍이 몰려와 몸을 휘청이게 한다. 정상에서의 바람도 장난이 아니다. 강풍이 휘청거릴 정도로 몰아치는데, 내손 얼어 붙는 것은 상관없이 사진을 찍어 달란다. 하산길에 같이 올랐던 중고딩 야구부원들이 아이젠이 없어 눈쌓인 계단을 엉덩이로 엉금엉금 기어 내려간다. 장갑은 다 젖어버리고 한녀석은 동상이 걸릴정도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급히 연과장과 한쪽 장갑씩을 벗어 손을 녹히고 끼워준다.
산행시간은 3.5시간이 소요되었다. 먹고 쉬고 한다고 하여도 4시간 안팎이면 충분할 것 같다. 하산하여 대포항에 자리를 잡고 모듬회를 안주로 푸짐한 뒤풀이를 하여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대포항>▼
노인전문정신과 전문